알을 깨고 나오라. <데미안>의 한 구절이 아니라, 강우석의 신작 <이끼>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이다. 강우석의 전작들은 3D 영화에 버금가는 입체감 있는 캐릭터들이 극 전체를 좌지우지해왔다. 운명과 사회구조의 종속된 이들은 자신의 삶을 비극에서 희극으로 승화시켰다. 반면 <이끼>는 구조와 형식이 이야기보다 먼저 작동하는 작품이다. 선 형식 후 내용. 형식에 죽고 살기에, 형식이 닫히는 순간 끝이 난다.
1. 감시
형식은 서사보다 먼저 움직인다. 이것이 강우석이 스스로 전작과 결별하는 지점이면서, 새롭게 시도하는 지점으로 보인다. 각각의 인물들은 권력과 앎의 지식으로 서로에게 족쇄를 채우고, 감시를 통해 누군가를 구속한다. 시선에서 벗어나면 살고 시선에 갇히면 죽는다. 그러나 시선과 응시의 차원을 가지고 이 영화에 접근할 때 함정에 빠진다.
영화 속 마을은 이장(정재영)의 집을 중심으로 전체가 부분을 내려다보는 판옵티콘의 구조다. 한 번 의심해보자, 뻔히 보이는 것을 구조라 할 수 있을까. 통상적으로 우리는 보일 듯 하지만 정작 손에는 잡히지 않는 것을 구조라 말한다. 구조는 이데올로기를 체현할 수 있는 공간, 대상, 인물 혹은 법과 같은 명령 체계로 구체화된다. "사회 질서는 그 정체성을 위협하는 위험들을 가시화한다"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하나의 질서체계가 가시화되어 드러났다는 것은, 그 구조 자체가 사회의 위험을 지탱하지 못함을 시사한다. 신호등 없는 곳보다 신호등 있는 곳이 사고 다발지역일지도 모른다. 교통법규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명분 외에도 사회에 처벌을 가할 목적을 수행한다. <이끼>의 감시체계도 그 구조인 동시에 내용이다. 마을에 권력 구조가 없었다면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의 감시체계는 중세의 그것처럼, 잉여상태로 솟아오른 구조를 체현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아니면 반전효과라도 노리듯, 영화는 지하토굴을 보여줌으로써 기존 체계의 결점을 보완한다. <이끼>의 감시체계는 너무 빤히 보인다. 이런 단순한 구조를 제시함에 있어서 이점은, 쉽사리 관객을 정치.사회적인 이야기 속으로 전이시켜 암흑의 시간 속, 미지의 사건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데 있다. 우리는 이 구조 안에서 전제군주적인 이장, 악의 숙주인 그의 삶의 이력을 보게 된다.
그러나 속아서는 안 된다. 물론 이야기는 이장에게서 시작해서 끝이 난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장이 끝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그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솟아오른다. 이장은 자신이 마을의 현재이며 최정점이라고 생각한다. 착각은 자만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이장은 젊은 세대가 딛고 올라선 땅이자, 무너뜨려야 하는 퇴적층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마을의 중추라고 믿는다. 반면 마을의 현재는 과거의 묘비들 위에서 유령처럼 존재한다. 판옵티콘의 구조가 부분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시놉티콘의 구조로 역전되는 부분이 바로 과거가 죽고 현재가 유령이 되는 순간이다. 이장마저도 감시의 대상에서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 서사는 급변한다. 이장의 판타지로 구축된, 이상적인 공간은 무너진다. 그리고 그 공간을 새롭게 구축하려는 게임으로 마을은 난장판이 되고 수사는 미궁 속에 빠진다.
여기서 새롭게 시작되는 것은 시놉티콘이라는 또 다른 구조가 아니다. 구조의 역전이 아니라 주체의 역전이다. 말하던 자는 침묵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억눌려왔던 자는 입을 뗀다. 혹여, 이 영화에서 응시, 시선, 훈육, 규율, 통제, 처벌의 시스템이 반복된다고 해서 그것이 전체를 지탱하는 큰 틀이라고 맹신하지는 말자. 관객에게 필요한 것은 드러난 구조의 허상을 깨닫는 것이다. <이끼>에서 감시체계는 영화 전체의 얼개가 아니라 서사다.

2. 프레임과 캔버스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틀에 갇히면 속고 틀에서 벗어나면 이긴다. 강우석은 전작과는 달리 구조와 그 구조를 허무는 방법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단순한 형식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문턱은 낮을수록 드나들기 쉬운 것처럼, 형식은 단순할수록 접근이 용이하게 한다. 그러나 쉽다는 게 함정이다. 우리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왜 뻔히 보이는 구조로 위장했던 걸까? 감시가 이 영화의 내용 중 하나라면, 형식은 무엇인가?
이 영화의 형식은 프레임의 단절이다. 프레임이 곧 이 영화의 형식이다. 영화 이미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연속성, 지속성, 비선형적 기억 이미지들은 <이끼>에서 프레임과 프레임 간의 단절로 중단된다. 예를 들어 유해국(박해일)이 카세트 테입에 녹음된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과거로 넘어가는 지점이 그러한데.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전석만과 하성규의 목소리는 현재와 과거를 매개한다. 그러나 청각 이미지가 매개한 과거와 현재는 하나의 총체로 거듭나지 않고 해체된다. 이전까지 영화는 천용덕을 중심으로 수직적인 네트워크 체제를 그려왔다. 그러나 플래시백으로 전환되면서 시간의 단절이 일어난다. 여기서 시간은 물리적 시간의 연속이지만, 엄밀히 말해 이야기의 단절이다.
플래시백은 기존의 얼개를 어그러뜨린다. 현재로부터 떨어져 나간 과거들은 촘촘한 권력의 그물을 찢어버리고, 수직적인 감시 체계가 작동하기 이전으로 돌아간다. 전성만과 하성규의 플래시백은 천용덕을 만나기 이전의 그들 본연의 과거다. 그러므로 플래시백 안에서 천용덕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난다. 그림의 중심점은 역전된다. 세계 지도를 보는 관점에 따라 그 중심이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로 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전성만과 하성규는 천용덕을 만나기 전에 저 마다의 세상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플래시백이 개입하면서 천용덕으로부터 개별 서사가 솟아나고, 개별 서사는 중심 서사로부터 이탈하고 단절하기를 거듭한다.
이영지(유선)의 증언은 이야기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그녀의 증언은 유목형(허준호)의 과거사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기능을 한다. 천용덕과 유목형 사이의 틈을 그녀가 메운다.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척점 사이에서 중간자가 등장하면서, 마을의 유토피아적 환상이 폭로된다.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유토피아는 추구하는 것이지 실현된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 마을은 시작부터 불안 요소가 있었던 것인데, 그 불안 요소는 성격이 전혀 다른 천용덕과 유목형의 만남이었다. 천용덕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위험을 끌어안고 사는 평화다. 반면, 유목형이 꿈꾸던 사회는 위험을 몰아낸 평화다. 둘의 차이는 확연하다. 전자의 경우 위험과 공포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이고, 후자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그것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지는 경우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핍은 같다. 유토피아를 가질 수 없다는 것. 그들은 평화로운 마을, 악이 존재하지 않는 마을을 바랬다는 점에서 같다. 다만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이 달랐다. 천용덕이 강압적 태도와 힘을 믿었다면 유목형은 유화적 태도와 정신을 믿었다. 한 명은 육체를, 다른 한 명은 정신을 다스리려고 했다. 이것은 대립처럼 보이나,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극소차이(minimal difference) 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영화는 시차를 바꾸었을 때 천용덕과 유목형의 본질은 별 반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선한 모습 뒤에 죄의식과 악을 누르고 사는 유목형이나, 악한 모습 뒤에 이율배반적인 선을 가지고 있는 천용덕의 차이는 경미하다. 마치 스마트폰을 브랜드별로 비교 분석하는 것만큼 무구한 대립이다. 그래봐야 목적은 같을 진데.
두 사람은 각자의 대극처럼 거울 이미지로 제시되지만, 두 사람 모두 한 쪽이 없으면 마을에서 존재감을 상실한다. 때문에 유해국이 유목형의 장례식에 찾아오면서 사건이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하게 여겨진다. 유목형이 죽었기에, 천용덕은 더 이상 자신의 결핍을 비춰줄 대상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적이 사라졌으니 평화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적이 사라졌기에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갈등 없이는 서사가 술에 물탄 것처럼 밋밋하니, 천용덕에게는 유목형을 대체할 적을 불러올 필요가 있었던 거다.
유해국의 등장은 새 시대의 새로운 그림이 도래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끼>에는 박민욱 검사(유준상)의 말처럼 유해국이 생각하던 그림 보다 더 ‘큰 그림’이 이 존재했다.
‘큰 그림’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이 영화에서 주체의 모호함 때문이다. 사건을 만드는 자, 그림을 그리는 자는 한층 애매하다. 천용덕은 자신이 마을을 만들었다고 믿지만, 유목형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유목형이 먼저 만들어 놓은 세계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거다. 유해국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자신이 이 마을의 과거를 캐내려고 한다. 직접 마을의 지도(약도)를 그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지만, 그 역시 이장이 그려놓은 그림 속에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셈이다. 이처럼 <이끼>는 중첩의 틀을 가지고 있기에 이미 그려진 그림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가 등장한다. 그림 속에 갇힌 자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배회한다. 한 명의 주체가 위풍당당하게 탐정처럼, 마치 화가처럼 사건을 그린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다. 그림 속에 갇힌 자는 그림을 보지 못한다.
이처럼 영화에서 그림의 주체는 가변적이다. <이끼>에서 주체와 객체는 나뉜다. 한 쪽은 그림을 그리는 자다. 다른 한 쪽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자다. 그리고 다시 나누어야 한다. 주체, 즉 그림을 그리는 자는 현재형과 과거형으로 나뉜다. 쉽게 말해 현재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와 한 때 그림을 그렸으나 아직도 자기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가 있다. 한 때 주체였던 자는 후일 객체로 전락한다. 객체, 즉 그림 속으로 들어 온 자들도 두 부류로 나누어야 한다. 자신이 그림의 일부라는 걸 알고 있는 자와 그것을 모르는 자. 말하자면 미몽을 깨고 나오는 자와 그렇지 못 한자, 쉽게 말해 한 때 객체였으나 깨달음 후 주체로 거듭나는 자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끼>는 과거와 현재, 실재와 환상, 꿈과 현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 관객을 끊임없이 이편과 저편으로 드나들게 만든다.
그림을 그린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다수다. 여기서 게임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림 속에 있기에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이런 장치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감독이 간과한 것은, 그림 속에서는 그림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 이야기는 닫힌다. 순간 관객, 배우, 심지어 연출자까지 자기가 그려 놓은 세상 속에서 심취해버린다. 이것이 정녕 끝이니, 믿으라는 의미심장한 눈빛. 불신이 아니라 확신을 주는 눈빛의 클로즈업. 위선을 절대적 확신으로 끌어 올리는 클로즈업의 기만적 작태. <이끼>가 위험한 지점은 여기, 관객과 영화 스스로를 환각상태로 만들어버리는 순간이다. 그게 단순하면서도 영악할 터. 그러니 속지 말고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