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의 집>은 페드로 코스타의 필모그래피에서 단연 특별하다. 후기작들과 가장 깊은 연계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이 영화엔 완전히 노쇠한 인간의 육체와 죽음의 상태만이 있다. 젊은이들이 주로 등장하지만 전작 <피>에서와는 달리 상대적인 젊음의 역동이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두 번째 작품인데 지나치게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너무 이르게 비관적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를 잘 보면 그는 젊은이들을 비관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주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신체적인 나이와는 별도로 세상의 나이, 대지의 나이를 염두한다. 살아있었던 화산(활화산)의 시간의 흔적을 보유한 용암의 대지로부터 그는 죽음의 지속성의 개념에 천착하는 듯 보인다. 여기에는 포르투갈의 오랜 소유권아래 있던 카보베르데섬의 식민 역사 또한 겹쳐있다. 영화 속 한 대사처럼 이 대지는 희생자들의 무덤인 셈이다.
영화에서 거리의 악사로 등장하는 노인은 '인간은 왜 아기로 태어나 노인으로 죽는지 모르겠다'라며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로 죽는 편이 낫지 않은지를 반문한다. 젊고 순전한 육체를 잃어가며 죽어가는 것보다 그를 회복해가는 삶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이다. 여기엔 세상의 창조자인 신의 섭리에 대한 부정 섞인 항변이 있다. 이 말에 비춘다면 신은 운명적 비관론자인 셈이다.
신은 6일 동안 창조한 자연의 세계를 단 하루 만에 만든 인간에 의해 다스리고 통치하라고 명했다. 신이 자신의 창조물인 자연세계에 대한 통치권 위임은 그 자체로 이율배반적이다. 이미 완벽한 물리적 상태의 자연 생태 세계에 가장 불완전한(흙과 숨결로 빚어진) 상태의 인간을 만들어 다스리라 명한 것은 인간의 이성과 영혼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며, 이를 시험해보는 것이다. 인간은 이 시험에서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위협 앞에 가장 먼저 이성을 포기했다(선악과 사건). 이로 인한 형벌이란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는 것과 자연을 다스리는 것이 아닌 자연을 향해 끊임없이 사죄행위를 하는 듯한 노동, 그리고 2세의 생산이었다. 인간은 노동과 생산을 통해 이성을 포기한 원죄의 대가를 끊임없이 대물림의 형태로 치러야 했다. 인류 최초의 아담은 성인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이 아이로 돌아간 것은 원죄 때문이었다. 즉 아이로 태어나 세상의 고통을 겪으며 늙어가야만 하는 것은 신의 인간에 대한 한순간의 좌절, 그 재현(들)이었다. <용암의 집>은 바로 이러한 재현(들)이 얼만큼 이 대지 위에서 반복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활화산의 사후증명들, 죽음의 증명(기억)인 용암의 대지 위에서 젊은이들은 시름시름 앓거나 원인모를 죽음을 당하고 목격자인 자들마저 그 대지로부터 굴러 떨어진다. 죽음의 형상과도 같은 무덤의 능곡선을 그리고 있는 대지 위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예고된 죽음과 사장을 당한다. 이러한 죽음들로 형성된 대지는 더욱 견고하게 세월의 무게를 견딘다.
이 영화에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과 그들의 안정된 집이 없다. 가족의 집은 계속하여 부정된다. 혈연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임시적인 방문과 동거의 형태만이 존재한다. 집의 문은 늘 열려있으며 이 곳은 방문자들의 임시 거처처럼 묘사되어 있다. 집과 집을, 집과 밖을 연결하는 열려있는 문과 그 문 밖으로 난 통로의 길은 미조구치의 세계관을 엿보는 듯 하다. 불교의 세계관도 떠올려봄직하다. 잠시 왔다 가는 나그네와도 같은 것으로 이승(생)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정착이란 곧 죽음과도 같은 것이며, 정착 이후의 삶을 죽음 그 너머의 저승의 삶으로, 그에 대한 이상이나 염원으로 보는 것이다. 살아있음에 대한 지독한 패러독스 같은 것, 과거(식민의 역사)로부터 어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탈과거적인 미래를 소망할 수도 없는 현재의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삶의 습관적 절망들 같은 것이다.
코스타의 혈연적 가족에 대한, 특히 그 2세의, 생명의 탄생에 대한 그의 시선은 놀랍도록 비관적이다. 데뷔작 <피>에서 자신을 가족으로 편입시키려는 젊은 남녀와 어른들로부터 아이는 탈출한다. 하지만 <용암의 집>에서 사람들이 모두 죽어나간 자리에 갓난아이가 하나 꿈틀대며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 아이를 보살필 어른은 마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기의 생명력은 끔찍한 어떤 것이 된다. 그가 가족 없이 자랐다는 것이 이러한 비관의 이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것은 사적인 토양 안에서 설명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혈연에 대한 것은 신의 인간에 대한 창조 역사, 구약성서로부터 신약성서에 이르는 메시야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신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혈연을 떠나는 것으로부터(그 명령과 순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이 '내 친척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난' 것, 그리고 모세가 가족의 품으로부터 강줄기를 타고 떠나와 적지의 공주의 손에 키워져 이집트의 왕자가 된 것, 그리고 '동정녀'의 아들 예수가 탄생한 역사는 한 계보로 이루어져있지만 이를 통한 인류의 구원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각각의 혈연으로부터 떠나는 것, 분리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용암의 집>이후 감독의 영화는 방문자로서의 영화를 성립시키는 것을 내러티브가 아닌 시스템 자체로 구현하려 한 시도이다. 감독은 이 같은 소규모의 스태프와 현지인들 간의 관계를 '가족 같다'라고 표현한다. 과거의 역사와는 달리 현대는 아무도 보살필 수 없는, 보살핌 받을 수 없는, 어미와 아비를 모르고 족보를 모르는 아이들과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역사는 계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에덴동산으로부터 떠난 것은 신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창조자인 신이라는 부모로부터 떠난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진정한 인간의 역사를 위한 길이었다. 혈연의 계보라는 것은 죄의 대물림의 형태이다. 일생의 노동으로도 씻을 수 없는 원죄를 끝없이 2세에게 대물림하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의 단절, 새로운 가족의 형태라는 것은 구약 시대로부터 예언되어왔다. 가족과 형제와 자매를 버리지 않고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자가 없다는 예수의 말은 구약시대의 전언이었다. <용암의 집>은 벗어나지도 못하고 꿈꿀 수도 없는 모순적인 현재에 부딪힌 영화이다. 그가 어떻게 그 이후에 놀라운 예술적 창조물들을 만들 수 있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해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