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카페 느와르]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찬사의 공간에 이미 와 있다

 

 

1.
정성일 평론가의 감독 데뷔작 <카페 느와르>는 영화광의 자산감, 자의식이 넘쳐나면서도 결국 고다르의 <국외자들>에서 보이는 그 쓸쓸함의 정서가 깊게 밴 춤의 제스처(안나 카리나의 국내 버전 '정유미'의 그것) 하나 하나를 더욱 인상깊게 남기는 영화다. 영화는 내내 걸어다니는 문학전집의 텍스트 같던 '신하균'을 죽음으로 애도하고 나서, 완전히 반대편에 위치한 자유로운 움직임을 가진 오토바이를 탄 '요조'의 젊음 에너지의 리듬을 타본다. 정성일 감독은 애도가 만연한 현실에서 완전히 절망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그녀들(정유미와 요조)에게 기대어 보는데, 그것에 도착하기까지 영화가 너무 단단하고 스스로도 완벽하려해서 외려 어설프면서 슬프게 느껴진다. 이것은 어쩌면 허우 샤오시엔의 <남국재견>과 지아장커의 <24시티>에 화답하는, 현재 이 도시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청계천에 대한 영화라고도 불릴 수도 있을 것이며, 이명박의 신화로 인해 탄생한 영화이자 이명박을 환영화하는 영화이고, 그의 도시 경관에 대한 독특한 미학적 비전에 투사되는 빛과 투자되는 자본을 이용하여 그것을 초월하려는 형태의 미학을 구사하려는 영화다. 이처럼 <카페 느와르>는 이와 같은 도시적 위기감을 영화적으로 해소하려는 지하전영의 영화정신과 맞닿아 있다.

롱 테이크가 아니었다면 3시간이 넘는 긴 영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긴 러닝 타임은 정성일의 화법이다. 영화의 작동 방식이 느린 것은 깊어진 정서의 표출 과정과도 관련이 있다. 이같은 것은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와 현실의 가치관에 대한 저항적 제스처로써, 현실의 폭력에 대처하는 하나의 행동 양식일 것이다. 물론 그 정지된 긴 시간 동안 감독의 머리 속이 범상한 자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정의 난해함과 난독의 고통이 수반되지만 말이다.

 

영화는 미국산 햄버거를 먹어 치우는 여린 소녀의 대단한 길이의 쇼트로 시작된다. 그녀의 식사 행위는 꾸역꾸역 식도에 집어 넣는 행위에 가까운데 이것은 처연하다. 소녀는 끝내 눈물을 터뜨리더니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말한다. 이 끔찍하기까지한 사실적 묘사는 영화 후반부에 인서트 된 청계천의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의 시위의 기록 장면들로 이어지고 나서, 그 후 흔적도 없이 텅 비어버린 청계천에 도착하게 된다. 세상에 대한 호소의 눈물을 흘렸던 현실의 소녀는, 도스토예프스키 『백야』를 원안으로 한 2부에서의 정유미(나스첸카 역)와 겹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리 위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눈물을 흘리던 나스첸카를 사랑하게 된 몽상가의 이야기가 이 현실과 맞닿은 청계천 위에서 촛불 소녀로부터 다시 씌여지는 것이다.

 

 


정성일 감독은 <극장전>의 첫 시퀀스를 인용하며 오즈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내려다본다. 하늘을 올려다보다 남산타워 꼭대기에 시선이 머무르고나서 그 전망대를 전지적 관찰자로 설정하여 홍상수의 '생각'을 구현하기 시작한다. 그는 영화평론가로서 오즈 야스지로와 허우 샤오시엔과 지아장커를 잇는 그의 영화적 계보에서 홍상수를 생각한다. 정성일은 홍상수 초기작 인물의 경향들, 즉 관념을 결코 '말하지 않으려는' '말할 수 없는' 영화 윤리적인 의도의 침묵의 몸짓들로, 사색적이고도 엘리트적인 경향의 최소한의 대사들을 읊어대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영화를 시작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안으로 한 1부에서 신하균과 문정희, 그리고 또 한편의 김혜나는 현실적인 불륜에 속해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 간의 사랑으로서 이들은 윤리적 고뇌에 빠져있다. 부질없고 회의적인 사랑을 하는 것 같지만 이들은 한결같은 지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마치 현실에서의 불가능성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들은 사랑을 이루려하지 않고 몸에 새기며 견디고 있는데, 이것은 몸 밖으로 말이 생성되기 까지의 과정을 함축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신하균의 몸 밖으로 어색하게 비집고나오는 텍스트로서의 말들은,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가 도착된 세상을 근심하는 정성일의 복화술이다.



2.
영화의 1부와 2부는 90년대와 2000년대를 가로지른 것으로써의 한국과 외국영화를 나누어 이어붙인 사유처럼도 보인다. 이는 과거와 현재, 자국민과 실향민, 이데올로기와 탈이데올로기등의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시대적 변화의 상징을 연결짓게 만든다. 부산 영화제에서 스크린을 통해 보는 온통 공사중인 서울 도심의 풍경은, 낯설어서 더욱 아려온다.

 

 


영화에는 목도리를 두르고 옷의 지퍼와 단추를 채운 채 갑갑하게 신체화 된 남녀와, 어디를 응시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 나란히 앞으로 서거나 앞과 뒤를 향해 서있음으로 180도 라인을 만드는 투샷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마치 스트라우브-위예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고전 텍스트를 바깥에서 기입하지 않고 그대로 읊을 때 외화면으로부터 단절되어 지리적으로 고정된다. 한편으로는 시의적으로 긴급한 것처럼 고전에서 튀어나와 2009년 서울 도심 한복판에 투입된 듯도 한데, 이는 도시에서 전쟁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전복 중인 상태로서 마치 무거운 임무를 띈 듯한 긴박성을 전달한다. 1부에서 신하균(영수)은 <살인의 추억>의 '짱돌'을 건네받지만 옥상에서 아래로 던지지 못하고, 근친상간적 비밀을 간직한 중산층 부르주아의 집에 <올드보이>의 '장도리'를 들고 찾아가나 내려치지 못한다. 살인은 '발생'되지 않는다.

정성일은 '피'라는 혈연공동체(민족주의와 가족주의)에 대한 자화상과 그 환멸을 담아내고 있는 박찬욱, 봉준호의 상징적 영화들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는 'B'형 남자가 되지 못한 채 오즈식 'A'형 남자이길 자처한다. 정성일은 B급 영화의 감독이길 거부한다. 아니 그보다는 영화를 B급화하지 않으려고 한다. 정치는 B급이나 영화는 A급이어야만 한다고 믿는 것일까. 영화에서 정치는 밑그림에 불과하다.

 

과거의 정치적 전범들이 여전히 권력의 핵심에서 기능하는 가운데 그들을 중심으로 구획되고 조직되는 대한민국 서울의 구도적 풍경이 간략하게 묘사된다. TV에서 생중계되는 진중권과 한나라당의 논쟁장면에서 그 분할 화면과 동일하게 형상화 된 중산층의 가정이 보인다. 한나라당의 미모의 여성 국회의원처럼 치장된 아내와, 고품격을 지향하는 남성 국회의원의 기름진 배를 동일하게 보유한 남편이 있다. 신하균은 이 가족의 여자를 사랑하게 된 죄의식에 눌려 있다. 사회와 개인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가 드러나고 그 교묘한 이중성을 건들이는 또 다른 여자(김혜나)가 그의 주변을 맴돈다. 결코 벗어날 수 없을 듯 보이는 진부한 운명론에 처한 한국 사회의 대리물들이 텔레비전 화면 구도를 벗어나 스크린의 변화된 비율에 들어설 때 그들은 윤리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여진다.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텍스트를 벗어나, 몽상가로서의 발화를 시작하는 영화의 2부는 탈국가적이고 디아스포라적인 감수성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흑백 영화로서, 1부의 구도적인 인상들을 가로지르며 탈주한다. 1부로부터 선택적으로 도착한 신하균은 하숙집에 머물렀다가 편지를 남기고 떠난 남자를 청계천 다리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여인 정유미를 만나 카페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한다. 그는 그녀와 청계천을 배회하던 중 흰 천막 안에 들어가는데, 그 안에는 펠리니의 광대 정신의 계보를 잇는 <20세기 소년 독본>의 하야시 가이조의 광대들이 있다. 그들은 무성영화적으로 '공연'하고 있다. 하야시 가이조와 정성일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잃어버린 이상향에 대한 실향민과도 같은 정서이다. 영화적으로 말하면 초기 흑백의 무성영화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과 향수 같은 것이다. 영화는 어쩌면 오프닝에 씌어진 글자들처럼 20세기에서 도착한 21세기, 그 소년의 독본일지 모른다.

실연의 아픔, 감정의 정지, 텅 비어버린 마음. 그 허한 공간을 따라 화려한 불빛을 뽐내는 청계천을 배회하던 남자는 거리의 집시 여인과도 같은 (어쩌면 줄리에타 마시나일지도 모르는) '요조'를 만나게 된다. 그녀들(정유미와 요조)에게는 차림새도 그러하지만 시간적, 공간적 좌표가 지워져 있다. 그들의 언어와 정서는 전혀 현실의 이데올로기와 관여되어 있지 않은데, 그 상실감 속에서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녀들은 아프면 춤을 추고, 우울하면 노래를 할 수 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것으로서의 순백에 가까운 무표정의 상태, 즉 고다르의 안나 카리나와 펠리니의 줄리에타 마시나 같은 소녀들이다. 그들은 텍스트가 발화되는 무대에, 시간으로부터 부유한 공간에 도착한 신하균이 만나게 되는 이상향의 산물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도착하여 요조의 오토바이와 함께 신나게 동승해 달려보는 카메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맛보는 지점이다. 이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반항적 운동감으로 현 정권이 토대로 삼은 복원(희생)된 청계천에서 이 정권을 향해 시위하는 매우 역설적인 쾌감인 것이다.

 

정성일의 영화는 어려웠지만 대단했다. 그럴 수 있다면 누군가는 상을 주어야만 한다. 시네아스트를 발굴하고, 영화의 거장들을 향해 오마주를 바치고, 아시아의 영화의 지형도를 만들어내던 정성일이 이 발붙일 곳 없이 민망한 투성이가 된 서울의 도심 위에서 직접 카메라를 들었을 때에 만들 수 있었던, 최상의 결과물이지 않았을까.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찬사의 공간에 지금 이미 와 있다.

 

2010.03.10
김시원(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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