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의 기원을 찾기 위하여

1.
단편 <질주환상>(2004)과 다큐멘터리 <거류>(2000)의 김소영 감독은 '김정'이란 새 이름으로 <경>(2009)을 만들었다. 감독은 <경>에서 <질주환상>의 사이버스페이스 상의 가상 행위를 현실 공간의 물리적 공간 속의 행위로 대입하려는 시도와 <거류>의 한국 여성의 기원을 찾는 다큐멘터리의 여정을 동시에 담아내려 하고 있다. <경>은 virtual과 real의 구조와 그 관계성으로부터 여성 섹슈얼리티의 기원을 탐사하려는, 거의 전례없는 시도가 돋보이는 비범한 영화이다. 여기에서 virtual과 real이란 개념은 <질주환상>과 <거류>에서 각각 물리적 형식과 역사의 내러티브로 구현된 바 있다.
<질주환상>에서 Birds(ID명)는 여행지에서 만났던 El Ciego로부터 온라인 메세지가 도착할 시간, 바깥으로 뛰어나가 산책로를 질주한다. 고속의 오토바이의 질주를 상대적으로 체감하게 되는데, 그 순간 심리적인 역동의 상태를 경험한다. 감독은 virtual을 현실에 잠재된 특정한 힘으로 상정한다. Birds를 통해 virtual이 real과 만나는 순간, 그것은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며 실재의 영역을 확장한다. virtual의 reality가 아니라 virtual의 actuality와 real의 actuality가 맞닿아 있는 매트릭스 구조의 새로운 형태의 삶의 영역이다. 감독은 IT가 새로운 권력으로 지배하는 현실에서 real이 배재되면서 real의 reality를 virtual을 통해 경험하는 부정적 형태를 탈피할 가능성을 시도한다(이는 F.가타리의 논리이면서 조금 다른 맥락에서 보자면 여기서의 부정적 형태란 지젝이 언급한 대체적인 매체에 지배 당하는 '수동성'이 '거짓의 능동성'으로 전환되는, 다시 말해 실재에 대한 열정이 가장에 대한 열정으로 대체되는 '상호수동성'에 대한 개념을 포함할 것이다. 물론 지젝은 가상을 실재와 구분지음으로 가타리와는 상반된다).
<거류>는 김소영 감독이 돌아가신 할머니의 기억을 찾기 위해 그녀가 부재하는 고향으로 여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카메라는 할머니를 대체할, 소환할 이미지를 찾아 거리를 유영한다. 하지만 현실 공간의 어디에도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문제문에 능해서 마을에서 대필을 했음에도 자신의 기록은 단 한자도 남기지 않았기에 할머니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 감독은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에 대한 기억을 내레이션한다. 그 순간 카메라는 어떤 기억의 이미지도 호출하지 않으며 텅 빈 공간을 응시하거나 둘러본다. 인터뷰어 중 유일한 혈연인 아버지와의 인터뷰 장면에서도 카메라와의 비일치응시(인터뷰 도중 카메라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는)를 통해 실재하지 않는 할머니의 비존재를 드러낸다(아버지는 인터뷰에서 할머니가 남편이 이미 떠난 고향으로 내려와 그가 없음을 확인하는 귀향을 했는데 그에 담긴 페이소스, 역설을 이야기한다). 이후 인터뷰 대상의 여성들은 부재하는 할머니와 어떤 혈통으로도 엮이지 않은 낯선 자들이다.
감독은 연령, 계급, 민족에서 차이를 보이는 여성들의 인터뷰를 보여준다. 언문제문에 능했던 노할머니와의 인터뷰는 자신의 할머니에 대한 대체 기억이다. 할머니가 언문제문을 낭독할 때 앞서 보여준 인터뷰가 역사화된다. 농사를 짓고 횟집을 운영하는 고향을 떠나온 여자들, 중국집을 운영하는 화교 여성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화교 여성은 무표정한 채 대만어로 대답하고 나서, 이내 자연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한국어로 그 뜻을 풀어낸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은 대만에 살고 싶으면 그곳에 살라고 할 것이고 한국에서 중국집을 돕겠다면 그렇게 하라고 할 것이다'며 '어디에서든 부모 잘 모시며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은 매한가지'라며 커다랗게 웃는다. 이어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게 되는데 감독은 이후 영화로 이어질 이야기의 맥을 여기에서 발견한다.
영화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남겨진 두 자매를 주목한다. 화가를 꿈꾸다 영국인 남편을 만나 이민을 간 언니 유승아가 유품 정리를 위해 귀향한다. 오래된 다방을 운영하며 골동품 수집을 해오던 부모님의 가업을 이은 건 동생 유경아다. 감독은 두 자매를 만나게 하지 않은 채 각각 다른 시공간에서 인터뷰한다. 유승아의 인터뷰는 앞선 화교 여성의 것처럼 현지어(영어)와 고국어(한국어)로 나누어 진행된다. 영어로 그녀의 신상과 일상이 설명되는데 목소리와 어투는 다소 경직되었으나 세련되게 느껴진다. 목소리가 그녀의 이미지와 겹칠 때 이 한국 여성인 유승아는 글로벌한 여성이 된다. 감독이 '자신은 어떠할 때 한국 여자라고 느끼는가'라고 질문하자 갑자기 그녀에게서 유창한 사투리가 흘러나온다. 그녀의 글로벌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토속의 이미지로 변모한다. 탈식민지시대 여성의 변화된 주체성에 대한 질문일 텐데, 현상의 부정적 행태(잔존하는 전근대성)가 드러난다(감독의 이러한 재연출의 인터뷰는 베트남 출신 트린 T. 민하의 <그녀 이름은 베트남>에서도 시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승아는 시집도 가지 않고 철도 덜 든 동생이 과연 부모님의 가업을 잘 이어갈 수 있을지를 염려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유승아의 인터뷰에선 오히려 언니 유경아의 편으로 그 염려가 되돌려지는 극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사투리를 무뚝뚝하게 내뱉던 피아니스트 유경아는 인터뷰를 마친 후 스크린 아래 관객을 상상의 건반으로 삼은 것처럼 (손가락이 보이지 않게) 피아노를 치며 입을 굳게 다문 채 우리의 편을 약간 높은, 다소 반항적인 시선으로서 응시한다. 타 인터뷰이의 경우처럼 이 장면이 그녀가 가진 언어의 재연이다. 언니의 경우와는 반대로 토속적인 이미지가 글로벌한, 공통의 감성을 가진 음악으로 대체되는 순간이다. 신체의 떠남과 정착이 정신의 그 방향성과 어긋난다.
이러한 결과들은 영화를 빠져나오기 전 영화 제작진의 젊은 여성(이연정)에게 도착한다. 이연정은 어머니의 삶, 그녀의 떠돌아다녔던 이야기들을 하면서 현재 자신이 어머니와 살고 있는 구로동의 재개발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내비친다. 어머니는 재개발을 염려하지만 자신은 재개발을 기대한다. 그녀는 '어머니는 그만 정착하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떠나고 싶다. 우리들은 어쩌면 여기에서 헤어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감독은 여성의 계보에서 전자가 후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후자가 전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른 것으로 배치한다. 여성들은 부모 세대가 죽고 나서 각각 집을 떠난다. 부모 세대의 죽음은 탈 식민지와 탈 이데올로기 시대를 상정한다. 이로부터 그녀들은 수직적 구도로부터 수평적으로 흩어지고, 원점으로부터 벗어나 외부로 탈주한다. 그녀들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그리고 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글로벌화가 진행되는 권력 구도의 재배치, 이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정보화 사회에서 웹의 공간이 현실 공간과 맞물리며 확장되는 물리적인 힘의 변화로부터 기인 혹은 역동한 정신적인 현상이다.

2.
이 영화들로부터 <경>을 다시 봐야할 것이다. 그것은 <경>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여기에서부터 '김정'인 감독은 영화에 대한 관객의 질문에 답하던 중 왕가위의 영화를 언급했다. 영화에서 주요 거점인 고속도로 휴게소는 24시간 불을 밝힌 곳인데 왕가위 영화에도 24시간 편의점이 매번 등장한다. 왕가위의 영화는 <아비정전>에서 낮(오후 3시)이 멈춘 이후 지속적으로 밤의 영화로서 밤에 가능한 모든 이미지와 행위들을 총 집결시킨다. 네온사인, 오토바이, 편의점, 가로등, 비, 어두운 레스토랑 등 오직 조명에 의해서 존재를 확인받는 모든 공간과 사물들은 밤에 움직인다. 공간이 어두워질 때 공간 속 존재는 영화의 조명 속에서 멜랑꼴리해진다. 이는 영화가 진행되는 도시 공간인 홍콩에 부여된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왕가위 영화에 산재하는 상실의 우울증은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의 우울한 결합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제국주의에서 다국적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서의 식민지 홍콩 공간의 문제적 세계이다. 왕가위 영화의 인물들은 이 세계에서 심리적 디아스포라를 재현한다.
디아스포라는 본래 민족국가의 물리적인 흩어짐을 뜻한다. 홍콩의 디아스포라의 불가능성은 조국과 기원의 회복에 대한 갈망의 형태, 즉 심리적 디아스포라로 재현되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이상향, 즉 다시 돌아갈 곳이 없는 상태는 정착, 퇴행, 노스텔지어와 같은 것으로 전진(前進)을 억압하는 후진(後進)의 방향성으로 나타난다. 이상향은 미래의 대체물을 위하여 늘 비어있고, 상실한 사랑은 과거화되기를 거부한다. 왕가위의 인물들은 상실한 대상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욕망을 보이며 그 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심리적으로 유착되지 않으려 한다. 심리적인 정지 상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상실한 첫사랑, 즉 어머니의 사랑을 대신하려는 대체 사랑은 지속적으로 빈 자리를 생성한다. 상실은 왕가위의 인물들에게 사랑의 필수 조건이 된다.
앞서 <경>의 리뷰에서도 썼지만 영화에서 '경'과 '창'은 영화 내내 떠돌아다니며 자신의 우울한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여성이자 영화 스크린이자 현실의 창이기도 한 '경'은 어머니(영화배우 고 신일선)와 동생 후경의 상실로부터, 남성이자 텔레비전 혹은 컴퓨터 화면(가상의 창)인 '창'은 상상력과 직장의 상실로부터 우울증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우울은 그들 각각이 상정하는 대상들의 우울을 내포한다. 이들은 대상 바깥의 상실을 그 대상_매체가 가진 물리적 공간안에 내면화함으로 우울증을 얻게 된다. 이렇게 경과 창은 각각 심리적 디아스포라를 재현하게 되는데 경은 서두의 <환상질주>에서 언급했듯 real actuality를, 창은 virual actuality를 보인다. 경은 남강 휴게소를, 창은 웹의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각자 상실한 대상을 'search'한다. 이들은 그 거점인 휴게소에서 충전을 한다. 그곳에서 음식을 먹고 밧데리를 충전한다. 경은 스크린에 존재했던 어머니의 상상력(정신병)을 투영하여 어머니-자신으로부터 이어질 계보로부터 탈주한 동생 '후경'을 찾아다니고, 창은 컴퓨터 스크린의 유리 안의 가상 이미지를 투영하여 그 화면 안에 존재했으나 화면 밖의 군대라는 조직에서 죽어버린 '상상력'을 찾아다닌다. 그러다 창이 경의 동생을 찾는 일에 일조하게 된다. 가상과 현실이 결합하는 것이다.
이들은 매번 떠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궤도를 반복하고 있다. 물리적인 공간이 상실로 인해 심리적인 공간으로 축소되고 이것은 안과 바깥을 구분짓는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이 흐릿한 상태이 멜랑콜리함, 즉 우울함은 물리적 공간에서 겪는 정신적인 우울증이다. 경은 후경을 잃어버리는 것, 즉 핏줄을 잃어버릴 것에 위기를 느낀다. 그러나 경은 후경을 마주쳤을 때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 휴게소 직원인 세아와 그녀의 디지털 정령처럼 여기에서 후경은 경의 virtual 이미지가 된다. 경은 자동차 유리를 사이에 두고 창의 사이버 공간에서의 경험을 현실 공간에서 동일한 형태로 겪는다. virtual은 현실의 또 다른 잠재력이 된다. 끊임없이 집을 나오며 또 다른 꿈을 꾸는 소녀들은 현실적으로 타락한 공간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범죄에 노출되어 간다. 경이 유흥가의 거리에서 차를 세우고 밖을 나와 거리를 근심어린 표정으로 오다닌다. 야한 옷차림의 소녀들이 네온 사인이 번쩍이는 거리를 배회하며 봉고차에 실려 떠난다. 감독은 후 세대의 여성들이 계속해서 집을 떠나고 그녀들의 빈 자리가 계속해서 다른 이미지로 대체되는 것들에 문제를 느낀다. 이것은 한국 여성사에 대한 위기 의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베트남 남자친구와 강제 이별한 후 메신저 친구인 세아의 도움으로 휴게소에 새롭게 취직한 후경으로부터 새로운 주체적 정체성을 가진 후 세대의 가능성을 보고자 한다. 후경은 '언니는 자신이 나를 낳은 엄마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며 자신을 찾는 언니의 행태를 비판한다. 자신은 새롭게 전진하고자하는데 경은 후진하고자 한다고 여긴다. 감독은 경이 후경을 마주치면서도 잡아 집으로 함께 돌아가지 않는 장면을 통해 전진과 후진간에 발생하는 운동성에 집중한다. 이 운동성은 <거류>에서 이연정의 말처럼 이들을 '각각 헤어지게 한다'. 후경에게서 자신의 또 다른 virtual을 경험한 경은 그 간의 대립의 과정으로부터 새로운 대안의 가능성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의 아휘와 보영은 홍콩의 대체 공간인 부에노스아아레스에서 다시 사랑하자고 말한다. '다시 사랑하자'는 말은 '돌아옴'과 '떠남'을 동시에 의미한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과 '새로운 방식으로 전진하려는 것'이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말이다. 이 '다시 시작함'에 대한 개념이 <경>에서 일결된 김소영의 여성주의 역사관이자 글로벌 시스템하에서의 세계관이자 텔리비전, 컴퓨터 화면과 동일상에 놓여진 영화에 대한 색다른 비전일 것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결코 서로에게 '도착'되지는 않습니다. 손을 잡지도 않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습니다. 언니인 '정경'이 '후경'의 뒷 모습을 좆고, 어느 길에선가 마주치는 그 순간, 저는 그것이 정경의 환상일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뒷 모습은 엇비슷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얼굴이 없는 얼굴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뒷 모습을 볼 때, 내가 기억하는 누군가의 얼굴을 그 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기억과 시간이 전혀 맥락에서 동떨어진 공간에서 (어쩌면 비로소) 육화하는 것입니다. 그 때, 뒷 모습의 주인은 꼭 자신이 기억하는 누군가와 맞아떨어질 이유는 없어집니다. 이미 부재하는 것을 통해 존재하고 있음을 불러내는 것이니까요. 그런의미에서 볼 때, 서로를 환상처럼, 또는 거울이미지처럼 보고 있다는 지적은 유효합니다.
그런데 휴게소에 취직한 후경이 새로운 주체적 정체성을 가진 세대의 가능성을 보는가에대해서 저는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심지어 저는 후경과 세아가 동일인물이라고도 보고 있습니다. 다만 정경은 그 이전까지, 아직은 동생 후경을 알아보지 못한 것일 뿐. 정경에게 후경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겠죠. 여하튼, 후경의 취업은 주체적이기 보다는 기존의 (남성 위주) 질서의 한켠을 비집고 들어간 것은 아닐까요. 어떻게든 그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나가는 것. 이것은 물론 주체적 행위의 하나가 될 수도 있겠지만, 무한한것 같은 선택지의 방향은 결국 하나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안정을 욕망하는 것. 그것을 위해 현재의 머무름을 버리는 것.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감독이 선택한 고속도로 휴계소라는 공간은 아주 적확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휴계소에서 잠시 쉼을 선택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곳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다만 그곳에서 집을 꿈꿀 뿐입니다. 자. 우리는 정말로 쉴 수 있는 곳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 이 영화는 어쩌면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후경에게 주체성을 씌운 것은 제 환상일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내내 후경의 떠다님은 순수한 비주체성의 흐름과도 같았으니까요. 다만 휴게소에 일시 정착하게 된 그녀의 모습으로부터 주체적 의지로서의 가능성을 그 위치에 놓고 싶은 것이었고요.
'끊임없이 안정을 욕망한다, 쉬고 싶고 정착하고 싶은데 그럴만한 자리가 없어서 불가피 하게 떠돌아다니는 현상'과, '정착을 원하지 않는 떠돌아다님'은 다른 것이고 한국사에서 각각 다른 세대의 현상이겠지요. 그것은 상호 수동성(거짓 능동성)과 순수한 수동성(능동적 수동)의 개념의 분명한 대비이기도 합니다.
거류의 엔딩(이연정의 인터뷰)에 대한 일단락이 경에 제시되어있다고 봅니다. 경의 아름다움은 각기 다른 의도의 떠돌아다님이 마주친 형상에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제가 글에서도 썼듯이 실재를 확장하는 순간이었어요
저 역시 후경의 모습에서 <거류>의 이연정을 떠올렸습니다. 위에는 그렇게 딴지를 걸었지만, 후경의 모습 (또는 세아의 모습)은 건강해 보입니다. 그들의 건강함은 그 무엇도 침범하지 못할 것 처럼 보입니다. 감독은 이들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남자는 끊임없이 표류하고, 여자는 눈앞의 것을 정작 바라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이가 들어감에 따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떤것에 포박된 것 처럼 보입니다.
<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추적의 대상이 되던 후경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드러냄을 통해 감독은 작은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