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시청 앞 광장엘 나갔다. ‘동물학대방지법 강력적용을 촉구하는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왜냐고 묻지 마시라. 찬바람이 부는 가운데 적지 않은 인원이 모였는데, 더러는 아이와 또 더러는 자신이 키우는 동물과 함께 참여하였다. 서울특별시청을 뒤에 두고 벌인 이 시위 현장에서 나는, 만일 ‘시네마테크전용관 건립 촉구 결의대회’가 열린다면 이곳이야말로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런 일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따라서 이 글은 일종의 ‘예방주사’이다.
먼저, 던지는 질문. 당신은 시네필인가? 영화광인가? 아니면 영화애호가인가. 비슷하기도 하고 쓰임새에 따라 다르기도 한 이 세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참으로 오묘하다. 아마도 남보다 조금 더 영화를 즐기는 정도의 부류를 영화애호가라 칭하고,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짬을 내 영화를 보는 이들을 영화광이라고 부르며, 주로 고전 예술영화에 몰입하는 등의 주관적 취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들을 통상 시네필(cinephile)이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오직 영화만이 유일한 소일거리요 취미인 사람에게 영화광 혹은 시네필이라는 칭호를 붙이기도 한다. 무엇이면 어떠랴. 다만 영화광과 영화애호가가 모든 수단, 즉 극장, DMB, PC모니터, 케이블TV를 막론하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인 반면, 시네필은 최소한 극장관람 원칙을 지켜나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시네필이라는 단어가 이 땅에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닌, 1960년대 유럽에서 발로한 영화운동의 지류로부터 탄생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의 영화광들에게 시네필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게 적절한 일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와서 시네필에 대한 용법을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탄생한 시대적 분위기와 행동양식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요컨대 시네필은 단순히 영화를 남보다 많이 보고 많이 아는 수준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다. 시네필은 영화를 통한 확대재생산에 참여하여 마침내 어떤 담론과 운동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쉽게 말해 자신만의 영화박물관을 짓는 것이 아닌, 영화로 발언하고 그 발언이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환경까지를 돌아보는 과정 속에서 오늘에 이를 수 있도록 부단히 움직이는 자들고 집단이다. 예컨대 고다르와 트뤼포, 혹은 로메르와 가렐의 필모그래피를 줄줄 꿰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비평적 언어와 조우했고 당대 유럽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며, 마침내 경향을 이루어냈는지를 영화계보학적으로 논쟁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그것은 영화를 보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글로 남기거나 토론과 학습을 통해 체득되어질 터이다. 그래서 시네필의 첫 째 화두는 ‘연결’과 ‘소통’이다. 남이 볼 새라 남이 먼저 알아챌 새라 고이접어 숨겨놓는 ‘밀봉’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만해도 꽤 오래전부터 이 땅의 시네필이라는 단어에 대해 회의를 품어왔으며, 몇 차례 글로 남긴 바도 있다. 마침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한창인데다가 ‘시네마테크전용관 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진 기념비적인 사건에 즈음해 시네필에 대한 이야기의 필요성이 더해졌다고나 할까.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니겠지만)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을 때마다 황급히 달려와 영화를 보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그는 누구일까? 라는 의문을 품곤 했다. 분명 마주앉아 족보를 따져보면 알만 한 사람일 것 같은 그(들). 적지 않은 사람이 시네마테크를 거쳐 갔고 지금도 시네필이라 자칭하며 그곳을 서성이는 이들로 가득한데 왜 그들의 목소리는 시네마테크전용관에 보태지지 못하는 것일까. 항상 답답한 마음이었다. 혹시라도 필름으로 영화를 볼 수만 있다면 그곳이 특정한 장소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내 의심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러니까 한국의 시네필은 시네마테크의 상영작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고 그 고색창연한 필모그래피를 켜켜이 쌓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취해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유순하고 평온한ㅡ내일 당장 시네마테크가 없어진다고 해도 나는 오늘 영화를 보겠다는ㅡ태도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게도 서울아트시네마 공식카페에 가보면, 영화에 대한 이야기, 상영작과 기대작, 감독과의 대화 등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공세가 전부일 정도로, 시네마테크 전용관에 관한 글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공간적 시간적 제약을 모르는 바도 아니요 각기 처한 상황과 입장이 다른 줄도 안다. 어쩌면 그것은 시대적 차이, 세대의 차이, 더 나아가 영화를 수용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전용관 문제는 건립추진위원회에 맡기고 영화나 열심히 보자는 건가. 물론 그것도 분명 도움이 되는 일이긴 하다. 문제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오는 3월 허리우드극장과의 계약이 만료된다.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그 시효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치 영화의 도착과 함께 그랬던 것처럼, 항상 그곳에 있어왔기에 세상에서 가장 느린 엘리베이터를 견디고 조금은 불편한 의자를 감수할 마음이라면, 찬란한 고전걸작을 볼 수 있음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이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행정적인 문제에까지 관여하라는 것이 아니다. 공적사무를 극장 측에 맡긴다하더라도 수혜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은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정성일은 “시네마테크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저 자주 영화를 보러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당한 얘기다. 하지만 그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사뭇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조금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때인 이유이다. 분위기를 만들고 이슈를 창출하여 대세를 이루도록, 그리하여 시네필과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의 염원인 시네마테크 전용관이 특정 취향을 가진 관객의 만족이나 지적호기심의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닌, 문화유산의 소중한 집을 짓는 중차대하고도 위대한 작업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것은 관객서명 운동도 좋고 릴레이 1인 시위도 효과적일 것이며, 시청 앞 광장에서 시네마테크전용관 설립 촉구결의대회여도 좋다. 가만 앉아있지 말고 무언가 하자는 것이다. 아직은 공식 입장이 나오지 않은 상태라 먼저 움직이긴 시기상조라 해도, 적어도 시네필이라면 한 발 앞서 발언하고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동참할 거라는 적극적 의지를 표명해야 하지 않겠나. 그때가 내일일지 또는 다음 달일지 혹은 태양 작렬하는 여름일지 모를지라도.
나는 이글을 ‘예방주사’라고 했다. 그러므로 다시 묻는다. 당신은(…) 정녕 시네필인가?
시네필이라는 이름은 부끄러운 이름일 수도 있고, 자랑스러운 이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의 조희문 위원장의 발언과는 별개로, 김영진 평론가는 몇 해 전 아트시네마에서의 상영 후 GV 자리에서 '이 곳에서 보면 의자가 마치 묘비명 처럼 보이고, 관객들은 묘지에서 살아나온 사람들 처럼 보인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오싹하게도, 어쩌면 시네필들의 진짜 모습을 꿰뚫고 있습니다. 시네필cine-phile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칫 시체애호 Necro-Phillia 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본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다른이의 눈에 그렇게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남은 뭐라하던 '나는 마이웨이'를 선언하는것이 시네필의 특권은 아닙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영화의 본질은 운동에 있습니다. 그러한 영화를 보는 이들도 어떤 형태로든 운동movement으로 이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
객석에 우두커니 앉아있자면 영화는 그 자체로 영화를 둘러싼 환경 안에 존재하고 그것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데, 영화는 (그것이 시체애호이건 죽음에 대한 애도이던) 현실에서 이 사회에서 적합한 자리를 원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아있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