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마이크 리 감독의 <네이키드>를 선택한 박찬옥 감독과의 대화 중 한 관객이 '벌거벗음에 대한 영화'라는 표현을 썼다. 순간 박찬옥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 <파주>의 인물들에 대해 '살가운'이란 표현을 썼던 것이 생각났다. <파주>는 운동권과 그 연장으로서의 현재의 철거민 대책위원들의 모습을 그린다. 감독은 운동권자로 수배 중인 중식의 애인(김보경)의 아이에게 치명적인 화상을 입힘으로 피붙이를 이미 상실한 상태 위에 그들을 위치시킨다. 수배 중인 운동권자들은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이 사회 공동체로부터 분리, 탈락되있다. 이러한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애정어린 감정보다 정치적 목적의 동지애로서의 느낌이 더욱 강하다. 그들은 사회의 정의를 위해 살을 맞댄 사이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절박한 것은 잃어버릴 애정이 아니라 사라질 진실이다. 하지만 현재 철거민 대책반에 가담한 은모의 경우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중식 때문에 정치적 투쟁을 선택한다. 그녀에게 절박한 것은 사회적 정의가 아니라 잃어버릴 애정이다.
이 사회에서의 운동은 사회적 열전과 개인적 냉전으로부터 사회적 냉전과 개인적 열전으로 변화되어 있다. 운동권은 당시의 죽음의 상들을 목격했다. 그 죽음은 사회 정치적인 죽음인데 그것을 목격한 이들에게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으로 자리 잡는다. 이 공적 현상은 부끄러움, 즉 개인적 수치라는 내밀한 감정으로 변화된다. 공적인 죽음이 사적인 치부가 되었다. 공적 공간에서의 애도는 오랜기간 금지되어 왔고, 이 금지는 사적인 분노로 갇혀 사회의 주변을 떠돌게 만들었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만개한 현재에 와 이 사적으로 누적된 치부감들은 새로운 자본 산업과 각종 신흥 종교적인 현상으로 변모하여 사회의 중심의 영역을 차지한다. 그것은 가족 중심의 서사로 회귀하고 있는 각종 문학과 영화의 텍스트로 대중화된다.
그들은 공론화되지 못한 죽음, 정치적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사적 애도로 그친 죽음에 대해 사적인 설득을 한다. 오래도록 주변적인 정서로 떠돌던 그들은 대중을 이미 공공으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운동권 초기의 상태, 잃어버린, 떠나온 혈연의 관계를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중들을 향해 실천하려 한다. 사회적 실천을 위해 결별했던 혈연에 대한 피붙이적 감정을 대중에게 노출할 때 신세대 대중들은 감정적으로 동요한다. 정치적으로 애도되지 못한 정치적 죽음이 대중적 슬픔으로 치환될 때 이 죽음은 정치적인 전복의 힘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 혁명이 불가한 이유이자 이 한 가운데 있었던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광장의 애도 현상이 정치적인 전복의 힘을 갖을 수 없었던(갖을 리 없었던) 이유이다.

<파주>에서 중식으로부터 은모로 이어지는 운동은 사실 중식의 알 수 없이 모호한 태도, 즉 완전히 정치적이지도 개인적이지도 않은 감정의 표출, 카리스마적인 행동력을 보여주면서도 한 편으로는 슬픈 감성을 내비치는 모순적인 모습이 그녀를 감성적으로 이끌리게 한 것에 더 가깝다. 박찬옥 감독은 이러한 운동권의 현재 자화상에 어떠한 평가도 배제한 채 그야말로 극중 은모에 가깝도록 신비스럽게 바라본다. 사적인 애정으로 이끌리는 것을 애써 회피하지도 않지만 그것에 어떤 확신을 갖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지금껏 잘 보지 못한 종류의 모호한 감정이다. 혈연의 관계는 더욱 아니며 혈연적으로 맺어진 형제애도 아니고 사적인 애정만도 아니다. 그렇다고 애증같은 진부한 감정은 더더욱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동안 상징적, 체계적으로 강요되어 온 사회의 감정적 폭력 구도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은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에서의 조니의 캐릭터를 떠오르게 한다.
이 영화에서 조니는 세기말적 풍경에 걸맞는 캐릭터로서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의 천사, 혹은 할 하틀리 <인생전서>의 예수라 지칭하는 인물이 이에 복합적으로 겹쳐진다. 하지만 조니는 그들보다는 좀 더 언더그라운드적 인물이다. 조니는 철학의 실천자이자 세상과 인류를 고민하는 메시아적 정체성을 가졌지만 현실의 처지는 그 이상으로부터 멀리 있는 난봉꾼에 가깝다(현실로는 하틀리의 <바보헨리>의 헨리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맨체스터를 떠나와 런던에 이르고 그 곳에서 전 애인 루이즈를 찾는다. 조니는 루이즈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으나 소피와 섹스를 한다. 그리고는 런던의 밤거리를 배회하며 소통할 사람들을 찾는다. 하지만 그의 이상과 고뇌를, 세상과 사람에 대한 절망감을 나눌만한 동지를 찾지 못한다. 조니는 자신을 타인에게 완전히 벌거벗은 채 노출하지만 그 타인들은 그런 그를 살갑게 여기지 않고 차갑게 내쫓는다. 조니는 타자와의 관계에 매번 실패한다. 그것은 극중 소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조니에게 완전히 빠져든 소피는 그와의 애정에 집착하지만 외려 집주인 제레미에게 성폭행을 당한 채 버려진다.
이 영화에서 네이키드한 인물은 조니와 소피이다. 그리고 이들은 마지막에 각자 다른 방향으로 떠나는 길을 택한다. <파주>에서 마지막에 사적인 사랑을 고백하며 스스로에게 어떤 사회적 입지도 남아 있지 않음을 벌거벗듯 드러낸 인물은 중식이지만 정작 떠나는 이는 은모이다. 은모는 모호함이 벗겨지자 떠난다. 그들은 서로 벌거벗은 상태를 견딜 수 없다. 사회는 더 이상 살가운 감정을 가족적, 혈연적 관계 그 이상으로 확장하려들지 않는다. 이 사회는 가부장의 폐해를 겪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정작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기성의 혈연적 제도권안으로 다시 회귀하려 한다. 그것은 이 사회 공동체를 더욱 혈연적인 공동체로 굳건하게 만든다. 운동권의 죽음을,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은 개인적인 감성의 영역으로, 사회 구성원 각자의 인간성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이 피붙이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친근하지 못한 것, 낯선 것들은 더욱 은밀하게 그러나 더욱 철저히 배제되어간다. 사랑과 우정은 벌거벗지 않아도 이해되는 선안에서 허용된다. 벌거벗은 자들의 자들의 유일한 선택은 떠나는 것이다. 그들이 비참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중식처럼 남겨지기 전에 조니처럼 떠나는 것이다. 이 사회는 공유되지 못하는 불화들을 이전보다 더욱 교묘하고 공고하게 배척해가고 있다.
<파주>의 은모가 떠나는 지점이 더욱 공고해진 혈연적 배타성의 사회를 보여준다면 <네이키드>는 그 폐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곳으로 회귀하지 않을 수 있을 유일한 가능성의 발걸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것이 여전히 발가벗겨진 개인이라는 것이, 여전히 절룩거린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우리는 왜 벌거벗은 채 나와 타자가 동일화 된 상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생존의 위기를 겪을 때 몸을 안쪽으로 추스릴 수밖엔 없는 것일까. 벌거벗은 공동체적 생존은 정말 이 사회에서 불가능한 것일까.

신속하고 탄력있는 글. 무엇보다도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일정 수준이상의 글을 뽑아내는 저력이 부럽습니다. 박찬옥 감독 GV 가 있던 날은 일때문에 못 봤고, 영화제 기간내에는 이번 일요일 밖에는 없어서 부랴부랴 챙겨 봤습니다. 예전에 국내 개봉 되었을 때 보았던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보았지만 여전히 난해한 영화이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론 파졸리니의 <테오레마>가 연상되었습니다. 다만 <테오레마>가 어떻게든 주인공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네이키드>는 파괴 되어지는 (이것도 변화이겠지만) 모습을 보여준다는것이 조금 다르겠습니다. <파주>와 함게 묶어내신 부분은 굉장히 공감이 컸습니다. 특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이 피붙이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친근하지 못한 것, 낯선 것들은 더욱 은밀하게 그러나 더욱 철저히 배제되어간다. 사랑과 우정은 벌거벗지 않아도 이해되는 선안에서 허용된다. 벌거벗은 자들의 자들의 유일한 선택은 떠나는 것이다. 그들이 비참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중식처럼 남겨지기 전에 조니처럼 떠나는 것이다. 이 사회는 공유되지 못하는 불화들을 이전보다 더욱 교묘하고 공고하게 배척해가고 있다.'
라는 부분과
'다만 그것이 여전히 발가벗겨진 개인이라는 것이, 여전히 절룩거린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우리는 왜 벌거벗은 채 나와 타자가 동일화 된 상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생존의 위기를 겪을 때 몸을 안쪽으로 추스릴 수밖엔 없는 것일까.'
이 두 부분이 특히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다만, '공적인 죽음이 사적인 치부가 되었다......이 사적으로 누적된 치부감들은'이라고 쓰셨는데. 그들, 그러니까 운동권 세대들의 감정이 개인적 치부,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것, 드러내기 힘든 어떤 것이 아닌,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서로가 말을 하기 어려운.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에게 용기가 없었다. 이러한 부끄러움에 대한 (끝이없는) 인식, 그리고 그것 때문에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그러한 마음인 '부채감'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에 관해선 22 일에서 23 일을 거치며 나누었던 이야기 속에도 조금 포함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 그리고 은모의 '가담'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가담이라면 어떻게든 이들의 일원, 그러니까 내부자로서의 정체성을 공유 (하거나 최소한 동의를)하는 것일텐데,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은모는 마치 위성처럼 중식의 주변을 서성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성은 그저 인력에만 끌려들어가는 것이 아닌, 끌려 들어가면서 동시에 밀어냅니다. 글에 적은 것 처럼, 중식이 개인적인 친밀함을 드러낼 때, 그것도 침대 위에서, 그리고 침대 밑에서 은모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는 순간, 은모는 떠나갑니다. 만약에 은모의 행위가 '가담'이었다면, 이러한 중식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은모는 그곳에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이 떠도는 것에 있었으니, 은모는 떠나가는 것이겠죠. 그래야 다시, 기어코 되돌아올 테니까요.
p.s 참. 그리고 '메시야'가 아니라. 메시아가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