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를 읽으며 얼마나 웃었던가! 저자의 매력은 그런 웃음 속에 사회적 관계와 사적 욕망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닌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깊이에의 강요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죽었다는 것을 읽으며 비장함과 위트를 동시에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최근 두 편의 영화<전우치>와<아바타>에 대해 '깊이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깊이'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기회가 되면 더 '깊게' 써 보고 싶지만, 오늘은 간략히 설명하려 한다.
영화에 깊이가 없다, 라는 것에서 표면상의 '영화'에 대해 잠시 언급해 보자. 아시다시피 영화는 종합예술이라 일컫는다. 회화, 음악(음향), 연기, 문학, (영화적)기술, 연출 등이 총 망라되어 있으면서 그것들의 유기적 조합이 새로운 장르의 예술을 탄생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중에서 한가지 부분만 잘 되었다고 그 작품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야기’가 담긴 영화가 관객에게 미칠 의식적 무의식적 파급효과와 위험성은 굳이 히틀러나 7,80년대 한국영화에 관한 예를 들지 않아도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결과치가 아니라도 내재적 요소로 남아있게 됨은 자명하다. 물론, 영화뿐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모든 요소들이 그러하듯. 포스트구조주의나 환경에 따른 교육심리학이나 히스테리에 관한 정신분석학을 운운하려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정황들이 영화와 관객 사이에 존재하면서 영화/관객 각각의 개체가 될 수 없음을 짚고 넘어가고자 했다.
나는 한국영화의 기술적 발전을 지지하는 까닭에 <해운대>와 <국가대표>에 대해 언급하기를 회피하였다. 종합예술임을 감안할 때 두 영화를 낙제점이라 평가할 수는 없었다. 또한 네오이마주 편집장님께서 세미나와 어느 에디토리얼에 언급하셨듯 나도 품위를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계는 여기까지.
<해운대>를 보자. 신과 신 혹은 시퀀스와 시퀀스의 투박한 연결은 차지하고라도 이야기 얼개의 엉성함, ‘ I’m your father’(김휘, 박중훈)를 외치는 우스꽝스러움, 느닷없는 강연희(하지원)의 통곡ㅡ최만식(설경구)의 어머니 앞에서ㅡ등은 9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겨우 힘겹게 끌어올린 ‘주체로서의 캐릭터’상을 ‘작위를 위한 작위의 캐릭터’로 재격하 시켰다. <국가대표>의 신파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러한 영화들이 12세 관람가, 심지어 보호자 동반 시 그 이하의 연령층 관객도 관람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주제나 그 안에 담긴 정치성이나 남성성/여성성(물론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뜻), 윤리성에 대한 직접적 의도 혹은 반감이 생기도록 포장하여ㅡ즉, 일부러 영화를 문학적 부분에서 저급하게 만드는ㅡ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구별해 낼 수 있는 판단력이 부족할 경우 생기는 부작용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게 되는가?
결국, 품위를 유지하든 유지하지 못하든 그 몫은 평론가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지독히 반복적이고 구태의연한 사조와 논리들로ㅡ영화의 미학적 가치에 관한 그들의 역할은 여기서 논외로하자.ㅡ영화를 난도질하여 욕을 먹더라도 그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그 역으로 관객이 잘 몰라보는 영화들이 어째서 깊이 있는 가치를 지니는지를 밝혀내는 것 또한 그들의 몫이다. 때문에 때론 관객과 영화인 모두의 질타나 외면을 받으면서 악평을 써야 하고, 때론 관객에게만 때론 영화인들에게만 미소의 화답을 듣기도 할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는 무겁고 무서운 칼날을 지닌 그들은 그래서 서글프고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명감은 내가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미 여러 매체에서 이루어진 <전우치>에 대한 그들의 혹평이나 나의 ‘깊이가 없다’는 글은 자칫 재미나 가벼움으로 치달을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면서 감독을 위해서는 격려를 관객을 위해서는 그들의 보호막이 되고자 함이다.
<아바타> 역시 같은 맥락이다. 미국역사의 치부인 인디언 정복과 이라크전이란 역사에 대한 회개인척하지만 결국 속죄는 피하고 싶다는 그 알량함을 드러낸 이 영화가 골든 글로브 작품상을 수상하는 것을 보면서, 작년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경우도 그렇고 미국의 평론가들 역시 입지여건이 열악하긴 마찬가지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차 언급컨대 <전우치>, <아바타>가 여러 변수들을 고려할 때 낙제점의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그들의 영화에는 깊이가 부족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깊이가 있는 작품성이 되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과학적 근거와 문학적 논리를 가져와 깊이 있는 작품성이 될 수 있는가를 연구하지만 이미 알려진 대로 영화는 ‘우연의 예술’이기도 하다. 때문에 하나의 작품에서 깊이있는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해도 그 감독의 작품이 늘 깊이가 있다고 선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없이 감독은 그들 나름의 최선을 다할 것이고 평론가들 역시 그들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영화에는 깊이가 없다. 고 생각합니다. 물리적으로도 스크린은 평면입니다.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마치 전우치가 (영화의 전우치든, <전우치전> 속의 전우치든) 환영술을 부리듯, 우리는 평면의 화면을 보며 깊이감을 느끼는 것일 뿐, 영화 자체는 필름의 연쇄물, 그러한 물리적 한계에 묶여있는 혹은 구속된, 혹은 (전우치처럼) 봉인되어진, 혹은 이 모든 것들을 품고 있는 거대한 기계장치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므로 해서,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는 깊이가 있습니다.
가령 <아바타>는 말씀하신 것 처럼 깊이가 결여 되거나 결핍 되어 있다고 말 할수 있습니다. 이 불편한 방식의 관람 환경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얻게되는 무엇, 그러니까 의미라던가 깊이는 굉장히 얇팍합니다. 들인 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화의 시작이 놀라움,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매혹이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카메론은 어떤 의미에서 시네마틱한 체험의 범주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원체험으로 아주 먼길을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아주 먼 길을 말이죠.
<아바타>를 수정주의 웨스턴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렇게 얄팍한 영화가 재미있는 점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작년에 용산 참사를 겪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기억은 우리 머릿속에 각인Projection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수 있겠지요. 저는 <아바타>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용산을 떠올렸습니다. 카메론이 용산을 알고서 아바타를 만든 것은 아니겠죠. 여하튼 그 순간 이 영화가 참 재미나게 생각 되었습니다. 영화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아바타(가상의 대리인격)를 '플레이'하는, 또는 플레이된 것을 리플레이해서 관망하는 이야기이지만, 또 반대로, 대한민국의 어느 겨울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조금은 다른 의미망을 획득합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어떤 부분이 현실의 '아바타'가 되는 것이죠. 아니면 그 반대였을까요?
<전우치>역시 그렇습니다. 저는 최동훈이 부적 한장짜리 얇팍한 수들의 연쇄, 또는 겹치기를 통해 또 다른 종류의 '깊이'를 획득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보는 쪽입니다. 그에대한 반증은 네오이마주에 많이 등록된 전우치 관련 글들을 통해 볼 수 있겠죠.
어떤 영화에 대해 깊이가 없다고 말하기는 일견, 쉽습니다. 그런데 깊이가 있고 없고가 판단기준, 그러니까 영화가 좋다 나쁘다, 혹은 재미있다 없다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가를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깊이'라는 것의 정량적인 수치를 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저는 홍은화님께서 조금 말을 아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이번 글에서 말이죠. 뭔가 이야기를 하시다 만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데요. 이 긴 덧글은 아마도 그 나머지 말을 더 듣고 싶은 맘에서 달고 있는 것이겠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활자로 된 문학작품을 비롯한 여러 장르의 예술에도 깊이가 없는게 아닐까요?(긴장해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덕천씨 말투) 물론 저는 농담입니다.
첫 줄에 밝혔듯 저는 모든 예술에는 ‘깊이’에 관한 담론을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추상적 ‘깊이’에 대한 개념을 제가 글을 쓸 때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원래 네오가 조용한 편이긴 하지만 제 안티 많을 줄로 압니다. 그래도 영화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관객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안에 담긴 위험성을 (당연히 여기서 위험성이란 영화가 위험하기만 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경고하고 싶습니다.
세련되고 우아하게 지적인 관객들이 담지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도에서만 글을 쓰고 싶지만, 실력이 부족한 탓인지, 인성 탓인지 제게는 너무도 먼 길이네요.
영화가 모든 관객에게 똑같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또 긴 댓들에 나타난 석중님의 <아바타>의 호평에도 공감이 가구요. 저는 용산참사까지는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연결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글의 주제인 <아바타>의 깊이 없음 때문입니다. 나비족처럼 신비한 능력-나무의 신을 포함해-이 있어야만 보호되고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인가, 인디언민족(아프리카 민족, 만일 말씀하신 대로라면 용산 거주민까지)은 나비족과 비슷한 문화양상을 가지고 있지만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 정복당했는가, 그렇다면 정복당해도 되는 것인가, 그동안 부족을 위해 싸운 예정된 후계자는 전설의 토루칸을 타지 못했다고 해서 족장이 되지 못하는가, 과연 어린 관객들은 제이크가 사명감이나 사랑을 위해 나비족이 되었다고 생각할까, 육체적 조건이 월등-다리를 수술 받지도 않고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하기에 나비족을 택했다고 생각할까 (설령 그것이 무의식적이더라도). 그러니까 결국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반성하기보다 자신들의 우월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건 아닌가. (사실, 더 많습니다)
<파주>에 불쑥 나타난 중식(과 등장인물들)이 결국 이루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 모두의 반성과 달리, 우리가 늘 경계해야만 할 미국식 영웅주의.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제가 상위 5위에 <불신지옥>과 <파주>를 놓고 망설였다가 개인적인 기호에 의해 –공포영화 광- 결국 <불신지옥>을 택했지만, 솔직히 제 사적 평가로 <아바타>보다 <파주>가 약 2.5배쯤 더 깊은 깊이를 지닌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자꾸 했던 말 해서 죄송하지만, 전들 옆 좌석의 어느 꼬마처럼 그 꽃잎들을 만져보고 싶지 않았을까요,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의 고귀함에 숙연해지지 않았을까요.
추신) 아- 편집장님은 *팔리게 (정말 품위와 담 쌓는!) spot에 올렸다 내리셨어요. 저 조숙현님 글 완전 좋아하는데 (마치 곽아람 저서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를 읽는 따스한 느낌) 오늘 제거 밀어내고 올리신 거 보고 쓸데없는 질투심 화르르 했다능!!! 날짜 보니까 저 보다 먼저 보내신 것 같은데. 아무리 열혈독자라고는 해도 괜한 부담감 가지시고 한,두시간 올려주시는 거라면 안 그러셔도 되요. 담에 또 그러시면, 네오의 제 안티 독자들이 원하는 대로 글 송고 안합니다.
물론, 이건 농담 아닙니다. 앗! 설마 편집장님도 안티 독자라서??? 케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