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 때 즈음이면, 어김없이 시네마테크에 대한 격문을 쓰게 된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맞춰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바쁘다는 핑계로 격조(隔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이렇게나마 만회해볼 요량이기도 하다. 혹자는 묻는다. 당신에게 시네마테크는 무엇이냐고. 가장 어려운 질문인 동시에 무엇보다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다. 먼저, 일 년 전 이던가, 《필름에 관한 짧은 사랑》에게서 시네마테크를 향한 애정표현을 요청받았을 때 이렇게 썼더랬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영화를 본다는 것이 함께 숨 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면, 나와 당신이 낙원동 골목 어귀에서 만났던 매 순간마다, 그 지긋지긋하게 느려터진 엘리베이터에서 황급히 빠져나올 때 마다, 같은 추억을 쌓았던 그곳. 세월의 연륜과 추억으로 겹겹이 쌓인 의심할 바 없는 명품영화를 만날 수 있는 ‘내 영혼의 충전소’ 시네마테크는, 서울아트시네마뿐이다. 그곳 외에는 생각조차해본 일이 없다.」
직장인들이 일에 권태를 느끼고 이직, 전직을 꿈꾸듯이, 나 역시 글쓰기를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대체로 영화보기가 시들해지다가 글이 난맥상을 보이더니 급기야 되도 않는 잡문을 부끄러움 없이 떡하니 내놓을 때가 그러한데, 이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어김없이 찾은 곳이 시네마테크였다.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가 시장이 반찬이듯 영화 한 편을 뚝딱 해치우고 나왔을 때의 포만감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불안감에 시달렸던 시간도, 한 자도 쓰지 못한 밤에 엄습해오던 초조함도 모두 떨쳐낼 것만 같은 안도감과 새로운 힘이라니. 좀 더 격하게 표현하자면, 내게 시네마테크는, 서울아트시네마는,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영화들은, ‘심폐소생술’에 다름 아니다.
심폐소생술이라고? 이거 참, 가져다 붙이는 것도 가지가지라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러니까 글로 밥을 먹는 사람으로서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호기심과 글쓰기에의 강력한 동기부여가 때때로 필요한 데, 적절한 시점에 재충전해주지 않았다가는 영영 글쓰기와 이별해야하는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마다 재생 혹은 소생의 원천으로 삼아 온 것이 시네마테크이고, 시네마테크의 영화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곤 했다는 얘기다.
올해도 오는 1월 15일 저녁 개막식을 시작으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린다. 동시대성과 조우하는 작품들이 다수 포진돼 있는 가운데, 상영작 면면만 둘러봐도 시네필의 구미를 잔뜩 당길 만한 것들로 푸짐하게 차려놓았다. 개막작은 루이 푀이야드의 1915년 무성영화 <뱀파이어>로 영화음악가 장영규의 연주와 함께 상영되고, 매년 관심을 모으는 ‘관객의 선택’은 장 엡스탱의 <어셔가의 몰락>으로 정해졌으며, ‘시네마테크의 선택’은 찰스 로튼의 저주받은 걸작 <사냥꾼의 밤>이 낙점되었다. 상영작을 일일이 열거할 순 없는 노릇이지만, 한 가지 더! 존 포드 특별전이 준비되어 있다는 점도 기억하자. 개인적으로는 존 포드의 영화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와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를 스크린으로 다시 보게 된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다. 멜로드라마의 장인 더글라스 서크의 <바람에 지다>와 불안과 슬픔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니콜라스 뢰그의 걸작공포 <쳐다보지 마라>도, 절대로 뇌리에서 잊혀 지지 않는 불세출의 클로즈업으로 엔딩을 장식한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도 놓치면 아까울 영화들이다.
고백하건대, 지난 한 해처럼 시네마테크와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입과 글로는 시네마테크를 지켜내자고 외쳤으면서도 정작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이제 나는 시네마테크로 향할 것이다. 시네마테크 역사에 이정표를 찍을 ‘2010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지지하고 응원할 것이다. 딱, 일주일 남았다. 미리미리 라인업을 살펴보고 시간표를 점검하자. 그곳! 시네마테크로 가자.
다음 주에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문제’를 가지고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