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존 포드의 비 서부극 몇 편에 대해

 

 

1.
많은 이들이 그러하겠지만 영화 보는 게 무감각해질 땐 좋아했던 영화를 다시 찾는다. 하워드 혹스를 보며 유쾌하고도 싶었지만 왠지 두 번은 안보게 되는 서부극의 존 포드를 떠올렸다. 존 포드는 유감스럽게도 비서부극으로만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뭐 그것은 그의 비서부극 영화를 특별히 좋아한 것과 상관이 없었는데 뒤늦게 알고보니 상관이 있는 것처럼 되었다. 그의 마지막 장편영화인 <일곱 여인들(1966)>을 무척 보고 싶었다. 하지만 구할 수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로 시작했다. <분노의 포도(1940)>보다 포드적 가치관으로 더 많이 나아간 영화이다. 10년 후에 나온 <수색자(1956)>의 스토리 구조나 정서적 기반도 상당 부분 이 영화에 빚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수 많은 장면에서 배창호 감독님의 영화들을 떠올리며 역시 한국의 존 포드! 라고 생각했다. 문학적인 영화, 휴머니즘에 기반한 주제도 그러하지만 전지적 시점, 느린 속도감, 드라마틱한 카메라 구도, 풍경화에 집중된 미장센(특히 들판과 길의 빼어난 원근법적 정경), 인물(혹은 동물)들의 등장과 퇴장 시점(소리를 동반한), 심지어 세세한 소품들까지 참 닮아있었다(좀 조잡한 비교일 수 있지만 기독교적 형상을 대변하는 듯한 십자로 엮인 나무 구조물, 16mm 카메라와 침팬지가 배 감독님의 <정>이나 <러브스토리>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자꾸만 빠져나오는 카메라, 즉 그는 두 인물에 대한 숏-리버스 숏이라기보단 인물과 정경을 마치 대화 신처럼 찍는다. 그러면서도 대상이 부재한, 어떤 초월적인 대상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을 한 인물들의 클로즈업을 종종 담아낼 때가 있다. 신과 대화하 듯, 마치 일상에서도 신을 느낀다는 듯, 기도를 중얼거리 듯한다.

 

존 포드의 신앙관은 꽤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며 구교적인 가치관을 벗어나 있다. 마을의 목사는 공동체의 주요한 일에 대해 최종결정을 내리는 공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과 흔쾌히 술을 즐기고 어울리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예수의 실천적 사랑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사람들 위에서 정죄, 판단, 군림하지 않는다(물론 수색자에서의 목사는 좀 불완전한 캐릭터로서 예외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목사의 시선은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시선과 겹쳐지며 공과 사에 얽힌 마을의 정서를 혼합한다. 아버지는 집안 권위의 상징이나 아내나 아들들은 스스로의 의견피력과 그 행동거지에 거칠 것이 없어 뵌다. 존 포드는 그 공동체가 이미 무너지거나 무너질 위기에 있는 상태에서 권위자(리더)의 모습을 찬찬이 보여준다. 그들이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아들들이 파업을 요구할 때도, 미국으로 떠나겠다며 단체로 짐을 쌀 때도, 마지막 희망인 막내 아들마저 공부를 그만두고 광부가 되겠다고 할 때에도 아버지는 말이 없이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선다. 비극은 그 육체를 파고들지만 그 육체는 집과 마을의 길, 그 동일한 풍경 속을 걷고 걸으며 우리에게 인장같은 모습을 남긴다. 존 포드는 슬픈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기쁨은 공동체의 호탕한 웃음소리들로, 슬픔은 사적인 하나의 물건과 정경을 통해 말한다.

 

 

 


이 영화의 첫 신, 어머니가 나들이를 갈 때 매셨던 머플러에 짐을 싸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흐른다.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의 느낌이 있는데, 초반부 들판에서 오누이가 노래를 부르듯 서로를 호명하는 것,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고 클래식 음악이 깔리며 극을 무대화하는 느낌, 교회에서 부르는 성가가 교회 밖의 공간을 나와 길거리에서 우렁차게 울려퍼질 때 그러하다. 그 중에 간간이 삽입되는 막내 아들의 독백은 거의 추억의 물건과 장소의 이미지에 대한 부연설명이다. 아버지가 용돈을 주시는 돈 통에 대해 말하며 그 통에서 네 형제에게 동전이 배분되는 장면을 기나긴 줄을 선 광부들이 각각의 삯을 받는 신과 어머니가 치마폭으로 동전을 받는 순간의 숏과 이어붙여 보여준다. 어머니의 보자기가 둘 씩 짝지어 다니는 마을 여인들의 머리에 쓰인 보자기가 되다 군중 속의 손가락질 하는 여인들에게 집단화된 후, 다시 한 장이 되어 홀로 남아 스스로의 짐을 싼다. 작은 동기와 사적인 정서, 소규모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 숨쉬던 애정들이 집단적 가치관에 의해 성격을 달리하다 결국 홀로 남게 되는 것, 굉장히 쓸쓸하고 슬픈 삶에 대한 가치관을 수량적 증감을 통해 이토록 정서적으로 그려낸 것은 오직 존 포드만이, 그로서만 가능했을 일이다.

 

가족과 공동체, 그 향수들을 보여줄 땐 여지없이 장 르누아르가 생각나기도 하는 것인데, 어떤 장면은 아주 자연스럽고 좀 의외스럽게 남아 신선함을 자극하다가 이어지는 또 다른 장면은 매우 엄숙하기도 하면서 감정을 조율하듯 리듬감 넘치는 편집을 보여줄 때 특히 그러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르누아르의 영화는 스르륵 시작하여 스르륵 사라지는, 즉 시작과 엔딩이 특별히 인상깊게 떠오르지 않는데 포드의 영화엔 그것들이 꽤 무게감있게 의식적으로 표현된다. 그는 영화를 시작하고 끝맺는 일을 마치 무대를 연출하고 끝내 듯, 극 영화에 대한 상당한 자의식적 집착을 보인다.


 

2.
워낙 유명한 영화이긴 해도 <모감보(1953)>나 <도노반의 산호초(1963)>같은 경우는 데이비드 린의 미국시절 영화들을 직접적으로 생각나게 한다. 제국주의의 양태가 영화의 배경이 된 것에서 물론 그러하긴 하지만, 아라비아 로렌스의 사막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이미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오누이간의 호명을 통해 교신된 것이며, <라이언의 처녀>에서 여인의 뒷모습과 함께 남은 매혹적인 노란 우산은 <모감보>에서 사파리에 우연처럼 도착한 에바 가드너의 우산에서 시작된 것일지 모른다. 공동체에서의 금기된 사랑에 대한 마녀 사냥과도 같은 재판 역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목사와 모린 오하라간의 사랑, 혹은 형수에 대한 남모를 애정같은 코드가 내재된 스토리에서 미리 보이는 것이다(당시의 원작이 된 소설들이 엇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겠으나 영화상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특히 <모감보>나 <도노반의 산호초>는 이마무라 쇼헤이가 <신들의 깊은 욕망(1968)>에서 상당히 모사한 것이기도 하다. 사파리에서 동물과 사람의 움직임을 동화시키려는 시도, 떼지어 나와 맞이하는 섬의 원주민, 엉긴 채 뒹굴며 싸우는 집단적 무리, 과학적 연구를 위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설정, 원주민의 원시적 기운에 점점 취해 돌변하는 인물에 대한 설정 등이 그렇다. 내 영화적 아카이브의 한계일 수 있겠으나 <도노반의 산호초>는 (의외로) 자크 타티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었다(진실로서 사랑을 느끼는 여인과는 늘 어긋나며 천방지축 미국 여인과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맺어주는 결말도 꽤나 유사한 것 같다. 그 외에도 복싱에 대한 매혹, 군대 동기, 온통 과잉된 힘의 결과물들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물건들에 대한 운동성을 보여주는 것들도 유사하지 않은가 싶다).

 

존 포드의 영화에선 신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장치들이 상당히 반복적이고 유사한 것인데, 먼 길을 걸어가는 두 인물의 풍경을 상황의 전후에 집어넣음으로써 드라마를 만드는, 어찌보면 히치콕의 관음증에 비견 혹은 그 이상이 될 영화의 형식적 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좀 이상하긴 했지만 모감보에선 그레이스 켈리가 나오는 신마다 블라인더나 조명을 사용하는 방식, 그녀의 캐릭터, 망원경을 통해 사건을 감찰하는 방식 등이 <이창(1954)>에서와 거의 겹칠만큼 유사하다. 무슨 영화에서 먼저 시도된 것인지는 시기가 비슷해서 잘 모르겠다). 자크 타티의 영화도 그러한데 거리에 인물들은 반드시 쌍으로(특히 동일한 복장의 여인, 수녀 등으로) 걸어다니며 상황과 상관없이 거리를 스치며 지나가다 남아서는 수근대며 관찰하는, 일종의 코미디적 발상 같기도 하지만 사실 작가의 의지적 인물들이자, 상상적 관찰자에 가까울 것이다.

 

그 외에도 건축물의 구조를 영화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닮았는데, 타티의 경우 그것 자체가 영화의 화면안에 들어와 하나의 주제를 이루는, 즉 타티가 화면상의 구조물을 영화적 고심점으로 사용한다면 존 포드는 그것을 통과하여서만 사람을 들여다 본다. 타티는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창조력에 털 끝하나 손상을 안 입히려는 듯 조심조심하다 와장창 엎어지고는 도망가버리는 코미디적 기법을 취하며 그것을 자기화하지 못하는데서 빚어지는, 즉 융화되지 못하는 지점을 고심한다면, 존 포드는 (물론 타티식의 현대적 건축물은 아니지만) 가옥의 구조, 철조망, 커텐(발) 등 모든 공간 구획의 장치들, 심지어 사파리나 남태평양의 자연경관이 가진 테두리적 형태들만으로도 영화의 안정적인 미장센을 만들어낸다. 타티는 안 보이는데서 보려고 노력하지만 포드는 보이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는 안 보려는 듯 하다. 타티는 사람을 관찰하다 결국은 유리창을 깨뜨려버리고 건물을 무너뜨린다. 그는 그런 난처한 환경속에서도 끝내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려놓지만 포드는 자연, 배경, 구조, 전체적인 밑그림을 앞서, 그리고 나중에 항상 더욱 길게, 배치함으로 전지적 시점, 즉 창조자인 신의 섭리, 그 더 넓디 넓을 바깥의 형식적 테두리를 염두해둠과 동시에 사람은 사라져도 여전히 남아있을 공간의 정동을 살려놓는데 집중하는 것이다.

 

 

 

 

2009.09.07
김시원(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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