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엔딩 크레딧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데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영화 재미있었나요?" 살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상영관을 청소하기 위해 들어온 초로의 어르신이 한 손에는 빗자루를, 한 손에는 쓰레받이를 들고 서 계셨다. 당시 상영관 안에 여전히 앉아 있던 관객은 나 하나밖에 없었고, 달리 할 말이 없어 영화를 본 감상을 답으로 이야기했다. "네,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러자 어르신이 본 영화의 감상이 돌아온다. "계속 봤지. 첫 부분은 못 봤고 중반부터. 근데 이게 너무 재미있는 거야."
어르신의 이 말을 들으며 문득 떠오른 것은 단순히 어떤 영화가 세대를 아우르는 재미를, 보는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차원의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영화가 퀴즈쇼 '누가 백만장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의 내밀한 구석에 숨겨 놓고 있는 진짜 자세는 관객의 마음을 퀴즈쇼 하나에 몰아넣어 동화시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적 자세는 아니었을는지.
'나는 구속되었다. 퀴즈쇼에서 우승한 대가로!'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이야기에 원천을 제공하는 비카스 스와루프의 소설 'Q and A' 의 시작을 여는 첫 문장은 이토록 암담한 구석을 깔고 있는 문장이다. 맞다. 소설 속 주인공 람 모하마드 토머스는 소위 말하는 '출신성분이 고상하지 못한 이유만으로 일자무식으로 보이기 딱 좋은' 친구로서 인도의 퀴즈쇼에 참여했다 대박을 터뜨렸다. 문제는 출신성분으로 인해 부정행위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온갖 쌩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런 암담한 시작점은 소설에서 영화판 'Q and A', 즉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온전히 옮겨간다. 소설 속 람 모하마드 토머스처럼 <슬럼독 밀리어네어> 속에 나오는 현실계의 자말 말릭 (데브 파텔 분) 역시 인도의 퀴즈쇼 '누가 백만장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에 참여하여 승승장구하다 부정행위를 했다는 의혹을 쓰고 붙잡혀 고문까지 당한다. 하지만 실상 그가 짊어진 죄목은 단 하나뿐이다. 천한 신분으로 성장하면서 너무 많은 체험 탑재형 상식들을 알고 있었다는 것.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본격적인 시작은 바로 이런 자말의 실질적 죄목의 근거가 하나 둘 속꺼풀을 벗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마치 양파의 껍질을 하나 둘 벗겨 내어 끝내 그 '놀이'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가장 안쪽 모습이 나타나는 것처럼, 자말의 맨몸뚱이를 감싸는 것은 수많은 시점 변화 속에 스민 성장담, 그 중에서도 세파가 만든 흔적들이다.
힌두교와 회교도 간 분쟁 속에서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트라우마, 어릴 적 친구 라티카 (루비아나 알리 -> 탄비 가네시 론카 -> 프리다 핀토 분) 를 지켜 주지 못하고 헤어졌던 것에 대한 일말의 후회감, 형 살림(아즈하루딘 모하메드 이스마일 -> 아슈토시 로보 가지와라 -> 마드허 미탈 분) 에 대한 애증, 기차에서 물건을 파는 것부터 시작해 비공식 타지마할 가이드를 거쳐 텔레마케팅 회사에서 차 대접을 하는 자말 (아유시 마헤시 케데카 -> 타나이 크헤다 -> 데브 파텔 분) 본인의 신세. 이 모든 것이 자말의 몸뚱이 겉부분에서 한꺼풀씩 차지하고 돌아간다. 그리고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이런 속꺼풀들을 동화의 빌미로 삼는다.
여기서 동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단어의 모든 의미가 될 수 있다. 가령 천한 신분의 자말이 퀴즈쇼에 나가 괄목한 모습을 보여 주며 세상의 조롱 - 극 초반 퀴즈쇼 진행자 프렘 (아닐 카푸르 분) 의 직설적 말들로 대표되는 - 에 어퍼컷을 날리는 모습 (중반 이후 자말은 여유를 보이는 한편 프렘에게 말로 한 방 먹이기까지 한다.) 은 동심을 바탕으로 지은 문학이라는 의미를 가진 동화童話의 모습이고, 후반부 자말이 마지막 문제를 푸는 풍경에 9000만 명이 넘는 시청자가 쏟아내는 관심이 나타내는 모습은 같이 화합한다는 의미를 가진 동화同和의 모습이다.
그리고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문제를 척척 맞히는 자말의 모습은 밖으로부터 얻어들인 지식 따위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의 동화同化적 모습을 띤다. 이 중 어떤 의미의 동화인가에 대해 고르는 것은 순전히 본 사람들의 몫. 중요한 것은 어떤 동화를 선택하든 고르는 순간 답이라는 것이다.

이런 동화적 이유가 성립하는 까닭에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여느 판타지나 상상화를 능가하는 늘씬한 삼색동화의 모습을 갖는다. 마치 보는 사람 앞에 놓인 이 120분짜리 활동사진이 하나의 꿈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영화 속 내용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설정이다. 누구나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달콤함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TV 퀴즈쇼에 눈을 집중하고, 퀴즈쇼가 아니었다면 영영 몰랐을지도 모르는 열여덟 소년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치고 응원하며 열광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는 극 중반 라티카의 대사를 통해 알려 주고 있다. "왜냐고? 인생을 벗어날 돌파구잖아."
이 대사가 유효하는 이상 영화 전면에 흐르는 상투성에 대한 고민은 증발하고야 만다. 가는 길이 명확히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은 대개 이야기의 상투성을 뒷받침하는 요소들을 전면에 배치하게 되는데 <슬럼독 밀리어네어>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 레드원 카메라와 SL-2K 디지털 카메라를 활용해 슬럼독(slumdog)들의 모습을 담은 역동적 활동사진을 구축한 것이 첫째, 관객으로 하여금 응원 자체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는 것이 둘째다.
첫째 요소를 뒷받침하는 대표적 장면은 극 초반부 도망다니기 바쁜 자말과 살림을 포함한 아이들의 거리 질주 장면이요, 둘째 요소를 뒷받침하는 대표적 장면은 단연 자말이 마지막 문제를 푸는 장면. 찬스로 건 전화를 받기 위해 타고 왔던 차를 향해 정신없이 내달리는 라티카의 모습과 퀴즈쇼 스튜디오 내부 모습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 주는 장면은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선물하는 카타르시스의 총 집합체로, 관객으로 하여금 "뛰어, 어서!" 라는 소리를 기어코 내지르게 만든다.
다시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엔딩 크레딧 이후의 시점으로 돌아가 이야기하자. 천진한 미소를 짓는 어르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분명 그 느낌은 염화미소에 다르지 않았다. 어르신의 표정에서 영화 속 자말의 모습에 열광하는 9000만명 시청자의 환호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늘씬한 삼색동화의 존립 근거이다. 가는 길은 명확하더라도, 그 활동사진이 내뱉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슬럼독의 반란은 충분히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120분 동안만이라도 우리의 머리를 잠식하는 각종 상식들을 모두 초기화하고 오로지 체험의 자세만을 엔진 삼아 즐겨 보는 것은 어떨까. 최소한 이 삼색동화를 보다 흥겹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라티카의 대사를 인용하여, "이건 구질구질한 인생을 잠시나마 벗을 수 있는 돌파구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