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그랜 토리노]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수업

<그랜 토리노> ⓒ워너브라더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자 배우로서 이스트우드의 모든 것에 대한 최종변론'  

 

<그랜 토리노>가 북미 지역에서 뚜껑을 연 이후 현지 비평가들이 쏟아낸 반응은 어느 새 이 한 줄의 문장으로 요약되고 있었다. 이스트우드의 모든 것에 대한 최종변론이라,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정확히 어떤 점을 들어 최종 변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시점은 왜 지금일까. 분명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끄트머리를 장식한다는 (<그랜 토리노>는 그의 마지막 출연작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단순한 의미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이스트우드 본인이 쥐고 있을 것이고, 영화 속 내용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이쯤 되니 영화 속 내용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사실 연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 나이대의 이야기였고, 내게 딱 맞는 역할이라고 느껴졌다.’ 이 (향후 멋들어진 영화로 각인될) 영화의 시나리오를 받아든 이후 든 생각에 대해 이스트우드는 실제로 이렇게 회고했다 한다. 비록 짧은 회고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이런 회고의 기록 자체가 <그랜 토리노>의 정서를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극의 중심축에 서 있는 캐릭터 월트 코왈스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스트우드 본인과 결부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부심이 강하고 완고하지만 언젠가는 신진 세력에 그 자리를 온전히 물려주어야 하는 존재이기에 코왈스키와 이스트우드는 결국 같은 처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스트우드가 왜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 매료되었을지 납득이 가는 대목. 즉 <그랜 토리노>는 단순한 드라마를 뛰어넘어 이스트우드 본인의 영화에 대한 애정이 섞인 회고록이라고도 일컬을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극의 중심을 형성하는 캐릭터인 월트 코왈스키는 대단히 완고한 성격의 인물이다. 매일같이 집을 수리하고 맥주를 마시고, 매달 이발을 하러 가며, M-1 소총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1972년형 ‘그랜 토리노‘를 반짝반짝 닦으며 애지중지 아끼고, 오랜 친구가 된 애견 외에 위로받을 수 있는 친구가 없는, 친지나 주변 사람들은 쓰임이 다한 늙은이 정도로 생각하지만 본인은 자부심으로 충만한, 이 모든 상황을 한 자리에 그러모으면 코왈스키의 내면을 지배하는 정서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 정서의 바탕에는 한국 전쟁 참전 경력을 가진 퇴역 군인 출신이라는 그림자가 있다.

유일한 생존자라는 자부심이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자존감을 형성하고, 이는 침을 뱉는 행위나 손가락총질 등의 세세한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마치 코왈스키의 여생 자체가 하나의 무용담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코왈스키 본인이 자신을 방패라고 지칭하듯, 그의 몸 자체가 하나의 방패 역할을 하여 마음을 닫고 있는 셈. <그랜 토리노> ⓒ 워너브라더스심리적으로는 끔찍하다고 할지라도 그 ‘망할‘ 유령이 몸 곳곳을 지배하는 한, 온전히 자기가 짊어지고 살아야 할 코왈스키의 업보다. 이는 코왈스키의 자존감을 대변하는 동시에 이스트우드의 자존감까지 대변한다.

이 잔잔한 물결에 파동을 일으켜야 하는 임무를 지닌 존재가 바로 이웃, 그 중에서도 수와 타오로 대변되는 몽족 이민자들의 커뮤니티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정착한 이들 세력은 코왈스키와 반대되는 정서를 품고 있는 사람들. <그랜 토리노>는 여기서 문화적 차이를 유발시키고, 이 문화적 차이를 통해 코왈스키가 거쳐야 할 구원을 차례대로 논한다. 본격적으로 몽족 이민자들과 엮이면서 처음에는 문화적 이질감이나 불쾌감 등을 느끼지만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그들의 문화와 사상, 생각을 알아가고, 이로 인해 사이의 단절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순서를 따른다. 하지만 그 진심을 드러내기 위해 자존심을 함부로 꺾을 필요는 애초에 없다. 자기 사상을 꺾지 않아도 남을 향한 귀를 열어 두고 있다면 소통의 여지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기에.

코왈스키와 엮이는 세력이 몽족 커뮤니티라면 이스트우드와 엮이는 세력은 단연 새로운 영화 세대가 될 것이다. 그게 앞으로 어떤 모습을 띠고 나타날지는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앞선 세대의 입장에 서 있는 이상 어떤 가르침을 남겨 두어야 한다는 과제가 남게 될 뿐이다. 앞에서 <그랜 토리노>를 ‘이스트우드의 최종변론‘ 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 최종변론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영화를 통해 이스트우드 본인이 전파하는 가르침이 이 최종변론의 심장이다. 마치 극중 타오가 직업을 얻고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코왈스키의 모습처럼 이스트우드 역시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가르침을 남기려 했으리라. 그 시기는 바로 지금이요, 그 결과는 명백히 <그랜 토리노>라는 한 영화의 결과로 가히 멋들어지게 관객들 앞에 도착했다. 단순한 객기가 아니다. 자신의 연륜과 자부심을 한 곳에 쏟아 부어 빚어낸 정교한 세공품과 같은 모습. <그랜 토리노>는 분명 이런 스타일의 영화다.

물론 진짜 마지막 수업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아직 감독으로서 혹은 제작자로서 완성할 커리어가 남아 있고, 사람들이 이 한 영화 세계의 레전드를 향해 ‘부디 만수무강하시길!‘ 이라고 외치고 있는 이상 아직 기회는 뒤에도 분명 남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랜 토리노>를 관람하고 나오면서 생각한 것은, 어쩌면 이스트우드 본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최대한의 가르침을 행할 수 있는 시점을 알고, 그 가르침을 최대한으로 발산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 이 멋들어진 최종변론의 가치는 이미 너무나 차고도 남기에 그 자체로 아름답다. 배우 이스트우드 옹, 당신의 마지막 가르침 정말 흥미로웠어요!

 

 

<그랜 토리노> ⓒ워너브라더스

2009.02.25
신은영(독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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