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네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러닝타임이 길다는 것이다. 그의 주요작품들, <무법자> 시리즈, <옛날옛적 서부에서>, 그리고 <옛날옛적 미국에서>까지 기본 3시간을 넘나드는 그의 영화들은 일정정도 영화를 보기에 앞서 마음의 짐을 지운다. 대체 어떤 영화길래 이렇게 길지? 영화 보다 졸면 어쩌나? 같은 생각들 말이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긴 러닝타임에 대한 강박관념은 저 멀리 날아가고 없다. 여기서 발견되는 그의 영화들의 두번째 특징은 바로 그 긴 러닝타임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재미에 있다. 어느 정도의 영화 보는 습관이 길러진 관객들에게 그의 영화는 무한 재미를 제공한다. 방대한 서사를 긴 러닝타임에 알맞게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으로 그의 영화는 쉽다. 레오네의 영화는 길고 긴 시간 속에 어마어마한 분량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헷갈리거나 어려워하지 않는다. 알아듣기 쉽게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서사를 다루는 감독의 시각에 확고한 그 무엇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이하 아메리카)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마지막 유작인 동시에 미국의 근현대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긴 러닝타임, 방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해하기 쉽다는 레오네의 영화 특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영화.
이탈리아 태생의, 영어 한 마디 못했던 감독이 웨스턴을 찍었던 것부터 남다른 이력이라 생각되지만, 미국의 건국 신화가 미국만의 이야기를 넘어 영화라는 매체를 타고 전세계로 전파된 것은 그럴수 있다 치더라도, 미국의 근, 현대사를 아메리카란 영화만큼이나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는 코플라의 <대부>와 스콜세지의 몇몇 영화들을 제외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수 있는 영화들 중에서는 찾아내기 힘들다. 그만큼 레오네가 <아메리카>를 통해 보인 작업은 일개 영화를 넘어 영화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에 관한 담론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고다르는 <아워뮤직>에서 이야기가 있으나 그것을 말할수 없는 자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빌려와 이야기하는 자. 라는 표현을 썼다. 역사가 있으나 그것을 말 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민족과 이야기는 없으나 그것을 말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의 역사를 빌어야 말하는 자. 라는 말을 하면서 미국의 영화가 다른 민족의 역사를 말하는 방식을 빗대어 꼬집는 말을 한적이 있다. (김성욱 평론가의 글 중에서 발췌) 숱하게 다른 나라의 이야기거리를 찾아내 영화화 시키는 할리우드에 대항해 세르지오 레오네가 미국의 역사를 말하는 방식은 고다르의 논리에 따르면 지극히 합리화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미국인이 아닌 감독이 말하는 미국의 역사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이 아닐까?
만약, 레오네가 웨스턴 장르에만 심취해서 그 장르의 문법을 비틀고 거기에서 재미만을 추구하는 감독이었다면, 그의 영화들은 그 수명이 지금만큼 길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 역사에 대한 거대 서사의 개요 안에서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활용한 세르지오 레오네.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분명히 알고 그것을 지극히 효율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던 감독. 과거 서부극에 열광하며 오마주란 이름으로 일종의 베끼기에 열광하는 요즘의 몇몇 감독들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시대의 장인이었다. 자, 그럼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지막 유작, 아메리카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이 영화를 <대부>와 비교하는 것은 좀 올드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하는 재미를 한번 누리고 싶다. 코플라의 <대부>는 <아메리카>와 비슷한 시대를 다루고 있다. 대공황시대의 아버지 세대 갱들에서부터 그 권력이 아들세대로 전이되는 과정. 그 과정속에서 폭력에 물들어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재미있게, 흡입력있게 보여준다. 그러나,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에 대한 극명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코플라는 말론브란드로 대변되는 아버지 세대의 미국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 에서 <대부> 리뷰를 보면, 그는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 “ 돈 빝 콜레오네-말론브랜도-는 관객의 공감을 얻는 정도가 아니라 존경심까지 불러 일으키는 캐릭터다. / <대부>는 마피아 내부의 시선을 통해 마피아를 바라본다. 그것이 바로 <대부>의 성공 비법이자 매력이며 마력이다” ) 그것때문에 대부는 다소 애매모호한 지점이 있다. 내부자의 시각으로 진행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폭력의 정당성이 의심받을지언정, 부정되고 있지는 않다고 할까? 그에 반해 <아메리카>는 <대부>에서 보여지는 내부자의 시선이 훨씬 미약하다. 권력과 폭력이 결탁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이익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영화는 분명히 보여준다. 마치 <석양의 무법자>에서 두 악당이 돈을 쫓아 끝없이 떠도는 궤적이 미국의 현대를 배경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스콜세지가 최근에 힘주어 만든 영화. <갱스 오브 뉴욕> 역시 코플라의 <대부>와 동일 선상에 있다. 이들에게는 아버지 세대의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안쓰러움과 이해 혹은 향수 같은 것들이 모호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즉, 내부자의 시선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아메리카>를 통해 보여지는 레오네의 시선에는 그 모호한 구석이 배제되어 있다. 제 3자의 입장이라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4시간에 육박하는 영화는 서사를 스트레이트로 진행하지 않는다. 플래시백의 범람이라 할 정도로 레오네는 이 영화에서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하는 플레시백을 많이 사용한다. 어찌보면 지극히 촌스러운 스타일의 편집방식을 4시간을 고집해서 사용하는 감독의 무모함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에 공을 들인 영화다. 하나를 보여주고 둘을 감추어 두는 레오네식 플레시백의 백미는 역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강도높게 네 명의 주인공의 운명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이들이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지? 란 그 사연을 구구절절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 로버트 드니로의 미소 한방. 관객들이 모든 이야기와 사연을 이미 알고 있는 마지막에 펼쳐지는 드니로의 미소. 그것이 과거의 향수인지, 혹은 자신들이 일구어놓은 인생에 대한 조소인지....혹자는 그 미소를 두고 과거의 평화롭고 한가했던 한때를 보여주는 향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친구의 죽음이란 충격적인 사건 뒤에 편집된 과거의 미소는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그 미소야 말로 레오네가 미국의 근,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압축이 아닐까?

영화를 보면 볼수록, 웨스턴이란 장르의 신적인 위치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미국영화의 고유 영역이라 인식되는 웨스턴이란 장르에서 과거의 장르 규칙을 비틀고, 그것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성했으며, 장르의 울타리를 넘어 그 장르가 추구하고자 했던 서사의 큰 틀마저 균열을 냈던,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를 보면서 굳이 아방가드로에 미치지 않아도, 대중과 소통하면서도 자신만의 시각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작가가 아닐까? 생각했다. 김성욱 평론가의 어느 글에서 읽었던 글귀. 매너리즘의 위대한 장인. 이란 말이 세르지오 레오네를 두고 전혀 아깝지 않다. 단, 수식어를 하나 더 붙이자면, 그는 매너리즘의 위대한 마지막 장인이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