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시각이 정말 편협한 건지 답답합니다. 어떤 인터넷 카페에 제 글에 대한 약간의 논쟁이 있었던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곳에 처음 올렸던 글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죄송합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설혹 또한번의 전투, 아니 논쟁이 벌어진다해도. (저의 영화시각에 대해 고찰해 보고 싶습니다. )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상상계, 상징계에 관한 이야기는 -이해하시겠지만- 성장의 단계와 고통을 표현하는데 이미 명명되어진 용어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음을 양해바랍니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 <식스센스>에 대한 전율은 내 생에 마지막 영화를 볼 때 까지도 잊지못할 "결말"로 기억 될 것이다.
나는 "반전" 대신 "결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샤말란 감독의 <식스센스> 이후, 공포영화의 감독들은 "반전"에 대한 어느정도의 고민을 해야 했을 것이고, 관객은 샤말란의 이후 작품들에서 계속된 "반전"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관객이 원한건 예상치 못한 결말 혹은 예상된 결말일지라도 "공포"의 원인에 대해 들여다 보고 싶을 뿐이었다.
고로 "<해프닝>이 재미없다 = '반전'이 없다"라는 등식을 성립시켜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반전"이란 말을 쓰기가 조심스럽다.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싫었던 이유는 이제, 영화의 좋은 부분들을 쓰는데 좀더 주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반전" 때문에 재미없었던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이번 영화가 다소 내게 실망으로 다가온 이유는 "샤말란" 특유의 "공포"가 딱히 공포스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인부들, 자신의 핀으로 목을 찌르는 여자, 총으로 연쇄적 자살을 하는 사람들, 전선에 목매달아 죽은 사람들 " 이런 장면에 "공포"를 느끼는 관객은 (미안하지만) 좀 유아적 관점인 듯하다. (지금 나는 실세계가 아닌 "영화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그리고 그 장면을 보고 내가 놀라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다)
곧 다가올 부천 판타스틱 영화만 해도 피 낭자한 슬래셔에 엽기적 살인, 자살의 "현상"을 넘쳐나게 만끽(?)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현상"들이 "공포" 라는 존재로 다가오려면 "공포의 원인"과 "공포에 대한 극복(혹은 탈피) 의지"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프닝>에서는 이 두 가지 모두가 미비하거나 심지어 결여되어버린다. (처음부터 결여된 것이 아니라, "죽게 된다면 함께 죽자!"라며 생존의지가 결여된다. 그렇다면 샤말란 감독 영화들의 "공포의 원인"은 왜 공포스러운가? 그것은 샤말란 감독 모든 작품에 등장한 특유의 시선으로 "공포의 원인"이 <"나"와 "다른 세계"의 존재>를 인지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극대화시켜 보여주기 때문이다.
<식스센스>(스포일러, 즉 반전내용 포함) 에서 주인공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귀신 세계를 보고 있으며, 아동 심리 치료사인 말콤(브루스 윌리스)은 이전에 그러한 귀신을 보는 아동에 대한 심리치료를 잘못했다가 총에 맞아 죽어 그 주인공과의 대면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말콤은 "나"라는 존재가 속해 있는 세계와 "나"라는 존재가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부정하던 "다른 세계"를 인지하게 되는 순간!(좀 더 아래 그 이유를 다시 언급) 관객은 경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식스센스>의 주인공은 "나"와 "타자" - 내가 여기서 타인이 아닌 타자라고 쓰는
이유는 타인이란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제 3의 인물이라 규정한다면, 타자란 "나" 이외의 모든 이를 뜻한다. 즉, 주인공의 엄마는 타자이되 타인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콤 역시 영화 전반에 걸쳐 마치 "나"를 도와주며 타인이 아닌 친구가 되므로 타자가 되는 것이다.-가 한 공간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또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경험하는 인물인 것이다. 주인공은 "공포의 탈피"를 "나"와 "다른 세계"의 타자를 도와주며 "공포"를 극복해 나간다.
샤말란의 첫 영화는 "공포"의 대명사로 볼 수 있는, 사후 세계 영역을 소재로 하였다. 이후 외계인 (싸인), 요정 (레이디 인 워터), 식물 (해프닝) 같은 영역의 소재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렇듯 "나"와 "다른 세계"의 접합은 "나"의 세계가 온전히 유일 존재가 아니라는 각성을 유발케 하는데 이에 대한 가장 쉽고 직설적 영화가 <빌리지>인 것이다.
샤말란 영화의 이런 담론 중, <식스 센스>를 단연 최고로 꼽는 이유는 단지, "반전"이라는 서사 장치가 아닌 말콤의 "타자화" 때문이다. <식스 센스>는 관객으로 하여금 "나 "의 존재가 주인공뿐만 아니라, 말콤에게로까지 확대되어 있다. 그러다 일순간 말콤은 "나"가 아닌 "타자" - 다른 (귀신) 세계의 인물 - 로 분리시킴으로써 관객에게 진귀한 경험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후 영화들이 "나"와 "다른 세계"를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구획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그의 첫(식스 센스) 플롯에 매료되었던 관객들은 다소 실망하기에 이르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전편들에 대해 다소 호평하는 이유는 "공포에 대한 극복 의지"라는 공포영화의 서사장치 때문이었다.
인간의 공포는 공포를 극복하거나 탈피하려고 노력할 때까지 "공포"를 느끼는 것이지 공포를 극복 할 의지가 없어진다면 "공포감" 역시 소멸되어진다고 본다.
<해프닝> 이전 작들은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트라우마를 포함한 ) 공포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함께 이야기가 전개 된다. 하지만, <해프닝>의 이야기에는 "공포 극복 의지"를 갖게 하기도 전에 "죽음 -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공포의 소멸-"을 택한다. 마치 , 영화 <인베이젼>에서 감염된 것처럼. 하지만 <인베이젼>에서는 감염의 경로인 "주사"라든가 기타 경로에 대해 도망치거나 싸울 수 있는 선택권이 있기에 감염되지 않으려하는"의지"가 존재하게 된다. 그 "의지"가 존재하는 순간까지만 "공포"인 것이다. 영화 <해프닝>에서는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이 감염되기 직전, 감염된 사람들을 보면서 갖는 "공포"를 함께 공유해야만 "공포 영화"라는 장르에 부합하면서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감염된 사람들"을 보라! 전혀 공포스럽지 않다.
자살을 택하지만 순간적인 고통만이 존재하며, 자살에 대한 종교적 물음은 회피되어진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바이러스 감염이므로) 이는 영화 <미스트>처럼 주인공들이 "괴 생물체"의 숙주가 된다거나, 고통 속에서 죽지도 못한다거나, 종교적 물음이 수반되는 "자살"을 해야 한다는 선택과 과정을 지켜보며 주인공들의 공포심이 관객에게 전이되었던 것과 같은 효과를 주지 못한다는 문제를 수반한다. "죽음이 전혀 공포(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공포영화"로서는 큰 무리수가 아닌가!
그런 와중에 주인공들이 삶의 의지를 포기하고 "함께 죽기"를 선택 하니, 영화 해프닝에서의 "공포"란 존재는 완전 소멸 되어 지고 만다. 그렇다고 공포를 제외한 다른 이야기 구조가 눈에 띄는 것도 아니다.
좀 더 공포 요소를 확대 시켜 보자면 식물이 인간에 대한 선별적 공격을 가한다는 것과 공포 가해자가 스스로 죽도록 한다는 것인데 , 그 요소들은 "선별적 공격"의 담론에 대해 별 감흥을 주지 못하면서 플롯을 이끄는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즉, 샤말란은 <"나"와 "다른 세계"의 인지와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들의 죽음 -해프닝에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수학선생과 학생, 세상과 소통을 끊은 할머니, <식스센스>에서 영혼의 존재(다른세계의 존재)를 인지하되 소통하지 못해 고통 받으며 살아가다 그러한 현상을 심리적 치료로 해결하려 했던 말콤을 죽인 인물.-을 빌어 "공포 영화"의 방식으로 "다른 세계"를 인정하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다른 세계"에 대한 규정이 이번 영화에서 모호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다른 세계"라는 것을 규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른 세계"가 존재 해야만 그 세계를 인지한다거나 소통한다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므로) 정말 "식물"인 것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으며 이러한 모호성은 9.11 테러처럼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공포는 비단 "정치적 문제만은 아니다"라는 위험한 사상이 담긴 프로파간다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9.11 (무영웅) 이후, <우주전쟁>이나 <미스트> 같은 영화들에서 주인공들은 더 이상 "영웅"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원인 없음 (명확하게 규정되어진" 다른 세계, 외계인과 다른 차원의 생물들")" 은 아니었다.
<해프닝>에서 인간이 "식물" 세계를 인정하고 소통하며 나아가 존중해야 한다는 담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 그렇게 보일까봐 영화는 계속 모호하게 처리한다. 왜냐하면 영화에서는 다른 가능성들을 제기 하면서 "정치적 문제 일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확보해 두고 싶어서였다.
물론, 두 마리 토끼 모두 놓쳤으며 위에 설명한대로 오히려 전자(정치적 문제만은 아니다)에 힘이 기울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영화 <해프닝>에서 "다른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을 치환하여 보면 꽤 흥미로워진다. 즉 "다른 세계(식물)"를 "나(식물)"로, "나"를 "다른 세계"로 치환하는 발상이다. (<식스센스>에서 말콤이 결국 "다른 세계의 인물"이었던 것처럼) "나(식물)" 는 멸종이나 존재 위협에 대한 공포를 느껴 "다른 세계(인간)"를 공격 할 수밖에 없다.는 모티브 말이다.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이다. 그럼에도 공존해야 한다.
"나의 세계" (혹은 "나" 라는 존재가 속한 세계 )와 "다른 세계"의 인지와 소통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 용어를 빌리자면, 상징계로의 입문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른 세계 "를 인지하고 그 세계와의 소통에 수반되는 고통을 공포영화로 표현해주는 샤말란의 이야기는 이번 <해프닝>이 재미없었다 해도 내게 늘 기대감을 갖게 할 것이다.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정말 감사합니다.
글도 끝까지 읽어주시고, 보기좋은 형식으로 갖춰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설혹 논쟁이 되지 않는다 해도 이런 기회를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렇듯 여러번 감사드리는 까닭은 A4 10장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 분량의 논쟁을 하고나니 나도 모르게 빠지게 된 슬럼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글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제가 오독을 한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지만, 용기를 내어 몇 마디 적어봅니다.
우선 저 개인은 공포영화광임에도 샤말란의 영화가 공포영화의 범주에서 정의되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샤말란의 '다른 세계'에 대한 집착은 '다른 세계'를 정의함으로써 타자와 소통하라는 메세지를 던지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되 그러한 한계 내에서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세계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는 '다른 세계'가 모호한 것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겠지요.
시각이 편협한가에 대한 문제는 딱히 이 글 하나만으로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글은 하나의 관점에 의해 씌여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두루 살피는 영화평은 재미도 없고, 별 쓸모도 없습니다. 그런 글을 읽느니 영화를 한 번 더 보는게 나을테고) 저 역시 하나의 관점 하에서 샤말란을 이해하고자 하는거구요.
네오이마주 편집의 깔끔한 형식은 마음에 들지만, 샤말란의 팬으로서 그 인터넷에서의 논쟁의 추이를 보고 싶네요. 홍은화님께서 정리하신 원본을 exh4@naver.com으로 보내주시거나, 아니면 그 토론글의 웹주소를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원래의 게시판에서 어떤 논쟁이 오고갔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다수의 사람들이 샤말란 영화에서 처음부터 '반전'을 예측하고 기대하다가 실망하면서 영화의 재미의 반을 놓치듯, 홍은화 님께서 '공포', '공포영화'라는 걸 너무 폭좁게 한정하시고 거기에 <해프닝>이란 영화를 가두시면서 실망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뭐 저도 <해프닝>을 샤말란의 전작들보다 재미없게 본 게 사실입니다만.)
'공포는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까지만 공포다'라고 하셨는데, 글쎄요, 호러영화에서도 상당히 일부 폭좁은 영화의 얘기가 아닐까요. 예컨대 저는 호러영화의 한 부분인 뱀파이어 영화 혹은 좀비영화가 상정하는 공포가 <해프닝>에서 묘사하는 자살씬들과 일맥상통해 있다고 보거든요. '저 세상(타자의 세상)'으로 이미 가버린 존재는 인식할 수 없는, 그러나 이쪽 세상의 인간의 의식에 있어 매우 혐오스럽게/비윤리적으로 보이는 특징들이지요. 말하자면, 소위 이쪽 세상에서 인간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공포...
인류가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과연 진화인가 아니면 동물 수준의 퇴화인가... 다수의 좀비/뱀파이어 영화는 이걸 ‘퇴화’로 전제하지요. <나는 전설이다> 같은 영화의 경우, 원작은 좀비화돼버린 신인류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마지막 남은 인간은 기꺼이 처형당하는 걸 선택하는데, 이건 말하자면 인류의 변화를 ‘진화’로 보는 것인 반면, 영화의 결말이 아주 다른 건 좀비화되는 걸 ‘퇴행’으로 보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적어도 영화매체는, 좀비에 대해서 여전히 무조건적인 반감을 드러내며 좀비를 적으로 규정하는 게 여전히 일반적인데, 이건 좀비란 존재를 인간보다 열등한, 혹은 퇴화된 존재로만 사고하는 한계가 아닐까 싶어요. 전 인류의 절대다수가 좀비가 됐고 이미 지들끼리 진화를 거쳤다면, 소위 인간들이 선선히 죽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대중영화들이 거기까지 나가지 않는 것을 상당히 불만스럽게 느끼고 있고요. 그런데 <해프닝>은 바로 뱀파이어 영화도 좀비영화도 아닌 주제에 그 공포를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으로 좀비란 존재들이 과거 ‘신비로운 미스테리’의 영역에서 다뤄졌던 것과 달리, 근래에 특히 <28일 후> 이후로 지속적으로 의학과 과학의 영역으로 묘사되는 것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러나 현상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영역들의 힘. 문제는 더 이상 신비한 신화의 세계도 아닌 과학의 세계임에도, 속시원히 원인을 밝힐 수가 없는 인간 문명의 한계인 것이겠고요.
사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포야말로 진정한 공포 아니겠습니까. 한국에서 호러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도 어떻게든 이쪽 인간이 납득하기 위한 인과관계나 설명을 집어넣으려는 강박 때문이고요. 연쇄살인마들이 판치는 슬래셔 무비의 공포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도 물론 크지만, 대체 생긴 건 인간인데 인간사회의 보편적 윤리를 거부하고 있는 저 알 수 없는 존재의, 이쪽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일관성있는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도 없는 우발성과 본능적인 공격성으로 가득찬 일련의 행동들 때문이 아닙니까.
전 <해프닝>의 공포가 사회마다 좀 다르게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해요. 환경 이슈가 상당히 보편화된 북미 및 서구 사회에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포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미 환경학 쪽에선 인간이야말로 지구 환경에 가장 암적인 존재라고 공공연히 얘기를 하는데, <해프닝>에서 다루는 자살신드롬의 기본 전제가 딱 그거 아닙니까. 그런 입장에서 보자면, 스스로 소멸을 선택하는 행동이야말로 자연의 부름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생명체의 반응인 건지도 모르지요. 문제는, 자연의 그 부름에 반응하지 못하는 소위 둔한 인간들의 눈에는 그렇게 자해와 자살을 하는 존재의 모습이 끔찍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거고요. 전 이 영화의 공포는 바로 그 아이러니에서 발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공포와, 홍은화 님이 상정하신 공포는 상당히 다른 영역이고, 이 영역의 기준을 가지고 저 영역을 얘기하는 텍스트를 평가하는 건 좀 어불성설이 아닐까라는 겁니다.
김시광님, 김숙현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위의 글에 쓰여진 "논쟁"에 대한 부분은 두분께서 쓰신 댓글 부분과 비슷한 부분이 담겨있습니다. 샤말란 영화가 " 공포영화"라는 장르로 구분지어지는 걸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군요. 그 부분은 제가 간과한 부분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그의 영화가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샤말란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 공포"를 통해 전달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시광님/ 님의 글을 읽고 힘이 났습니다. 논쟁의 주소는 메일로 보내드렸구요. (그래도 영화평론가가 꿈인 저는 좀 더 많은 이들이 제 글에 나타난 시각으로도 영화를 다시 한번 통찰하고 공감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두 분의 답글을 읽고 편집자님의 논쟁을 싣지 않은 의도를 더 확실하게 공감했습니다. 아마 님께서도 공감하실거에요.
김숙현님/ 님의 새로운 시각에 대해 다시금 생각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가지 맘에 걸리는 것은 " 좀비 "는 퇴화된 존재가 아니다.(퇴화된 존재로만 보아선 안된다)고 하셨는데, 좀비는 영혼이 없는 존재입니다.
애초 '좀비'라는 존재의 근원이 된, 부두교의 주술에 의해 시체가 걸어다니는 존재라고만 한정짓는다면 '영혼이 없는 존재'라는 단정이 맞습니다만, 좀비영화들이 좀비를 그렇게만 다루고 있진 않습니다. 사실 제 관점은 그리 독특한 것도 아닌 것이, 지들까리 사회를 이루고 진화를 이룬다는 설정은 이미 리처드 매디슨의 '나는 전설이다' 원작에서 나오고 있는 얘기인걸요. (좀비를 퇴화된 존재로만 봐선 안 된다기보다, 그렇지 않은 존재로 다루는 영화도 좀 보고싶다는 거지요.) 좀비영화의 황제라 할 수 있는 조지 로메로만 하더라도 <랜드 오브 더 데드>로 가면 '각성'하고 지능을 얻는 좀비가 나오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조지 로메로 지지자들의 공분을 자아냈던, <28일 후> 및 <새벽의 저주> 이후 다수의 좀비영화에서 등장하는 '겁나 빠른' 좀비들은 영혼이 없는 존재라기보다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인간에서 동물로 떨어진 존재들로 묘사되고 있죠. 대충 인간광우병 정도로.
'나는 전설이다' 원작도 그러하지만, 딱히 좀비와 흡혈귀의 존재가 구별되지 않고 이미지가 혼합되는 영화들은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 영화들을 고려하자면, '좀비는 영혼이 없다'고 딱 잘라서 말하기도 좀 묘해지지요.